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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배 May 22. 2024

감자 꽃 이 피었습니다.

쓸데없음과 있음의 사이에서

매끈한 초록색 잎사귀 사이,

하얀 손수건 속 소중히 담긴 노란색 방울처럼,


감자 꽃이 예쁘게도 피었다.


수확이 보장된 튼튼한 종자용 감자가 아닌

집 냉장고 귀퉁이 서늘하게 잊혀져 가던 감자들이라 과연 싹이나 나오려나,

올해 감자밭은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하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걱정은 초조함을 낳아 감자를 심은 날로부터 매일같이 감자를 덮고 있는 흙을 매섭게 바라보며, 오늘은 뭐라도 움트려나

오늘은 새싹이 흙을 조금 밀어내려나 전전 긍긍한 것이 불과 두 달도 되지 않았다.


봄비가 흠뻑 하고도 많이 내리고 난 뒤

감자 싹들이 하나둘씩 머리를 내밀며 나오기 시작하더니, 한번 돋아난 새싹은 날마다 그날의 온도와 습도와 기분에 따라 매일이 다른 속도로 힘차게 줄기를 뻗어냈더랬다.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를 지켜보던 그때가 떠올랐다.

한발 뗄 때마다 기우뚱기우뚱 넘어질 것 같아 마음을 졸였던 그때.

한 번 걷기 시작하고 나서는 막을 수 없는 질주본능으로 방향이 어느 쪽이든 동서남북 상관없이 무섭게 앞으로만 발을 내딛던 아이.

감자줄기의 성장은 무서운 질주본능과 너무도 닮아있었다.


그래서 더 감자에게 눈길이 가고 애틋한 마음이 드는가 보다 했다.


그렇게 연두에서 초록으로 잎사귀 색의 채도도 짙어질 때 예쁘기도 예쁜 하얀 감자꽃이 피었다.


학교 텃밭에 감자를 심기 전엔,

내가 직접 감자를 키워보기 전엔

감자라는 작물에서 꽃이 핀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감자는 과학책에 나오던 그림처럼 줄기 밑 땅속에 알알이 맺혀있는 그 뿌리.

그 하나의 이미지로 내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었기에 감자 꽃은 상상을 할 겨를도 여유도 없었다.


이렇게 하얀색이 있을 수 있을까 싶게

하얀 꽃잎이 멋진 주름을 지며 펼쳐져 있고, 그 안에는 노란 수술과 암술이 돋아나 있다.

감자꽃이 나고, 감자밭엔 나비도 날아들었다.


허허벌판 흙뿐이었던 밭에 어느새 풀과, 꽃과 나비가 어우러지는 하나의 작은 자연이 만들어졌다.


감자 꽃의 꽃말은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소담하게 예쁜 꽃에 이토록 순종적인 꽃말이라니.


흔히, 감자 농사에서 굵은 감자를 얻기 위해선

줄기와 꽃은 따주어야 한다고 한다.

두세 줄기의 줄기보단 하나의 줄기에,

먹지도 못하는 열매가 달리는 감자 꽃으로 분산되는 영양분을 최소한으로 하고 뿌리에 달릴 감자에 더 많은 영양분이 갈 수 있게 말이다.


감자에서 중요한 건 꽃이 아닌 뿌리열매인걸 안다는 듯이, 자신의 생존에 크게 연연하지 않겠다는 초월한 어떤 경지에 이른 느낌의 꽃말이랄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 뜻대로

감자꽃을 따지 않기로 했다.


줄기도 그대로, 돋아나고 싶은 만큼 돋아 나도록

자유롭게 자랄 수 있도록 두고 지켜보기로 했다.

우리가 학교 텃밭에 작물을 키우는 것은 다작의 풍년이 목표가 아니기에.


영양분이 고스란히 감자로 갈 수 있게

줄기도 따주고, 꽃도 따주면 크고 실한 감자가 열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자가 자유롭게 위로는 줄기를 아래로는 뿌리를 뻗어나가게 둔다면 작지만 옹기종기 귀여운 알맹이들이 달릴터이다.


아이에게도 내가 먼저 아이에게 위험할 것은 미리 치우고, 좋을 것들만 아이에게 주려고 하면

아마도 아이는 훌륭한 사람으로 자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매력이 있는 사람으로 자랄지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가

질주본능을 지나 본인만의 방식으로 친구를 만나고 본인만의 작은 사회를 만들듯이, 아이 스스로 뻗어나가는 것을 지켜봐 주는 게 부모로서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최소한의 조력자.

멀리서 자유롭게 지켜보고 감당하지 못할 위험에서 지켜주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부모의 모습이다.


적어도 우리 학교 텃밭의 감자는 자유롭게 자라도록 둘 것이다.

감당하지 못할 잡초의 위험은 막아주면서.


감자꽃의 쓸모는 내가 구태여 정하지 않겠다.

어느 감자밭에서는 쓸모없이 여겨져 꺾여지고 말 감자꽃을 우리는 귀하고 예쁘게 봐 줄것이다.

우리 텃밭 감자꽃의 꽃말은 이것으로 해야겠다.


감자꽃. 너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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