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0시 30분, 사무실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진다. 파티션 너머로 김 대리가 팀장의 호출을 받고 일어선다.
그의 손에는 지난 사흘간 야근으로 피와 살을 갈아 넣은 기획안이 들려 있다. 발걸음은 흡사 재판정을 향하는 피고인처럼 무겁다. 잠시 후, 정적을 깨고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려온다.
"다시 써. 고민한 흔적이 안 보이잖아."
보고서가 책상 위에 툭 던져진다. 허공을 가르는 붉은 펜 소리가 신경을 긁는다. 김 대리는 고개를 숙인 채 "죄송합니다"를 웅얼거리고 자리로 돌아온다.
그의 등은 죄인처럼 굽어 있다. 모니터 앞에 앉은 그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고, 눈동자는 갈 곳을 잃었다.
고작 A4 용지 10장 남짓한 종이 뭉치다. 그 안에 담긴 건 활자일 뿐인데, 그는 마치 자신의 인격 전체가 빨간 줄로 난도질당한 것처럼 무너져 내린다.
반려된 것은 '업무'인데, 왜 상처 입는 것은 '나'라는 존재일까. 거절당한 종이 쪼가리와 자신의 자존감을 동일시하는 비극이, 오늘도 이 사무실 한구석에서 조용히 상영되고 있다.
김 대리의 무너진 어깨에 책 한 권이 떠올라 꺼내 들었다. '염세주의자'라는 꼬리표가 붙은 까칠한 철학자, 아서 쇼펜하우어의 에세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이다.
평생을 고독하게 살며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봤던 그는, 놀랍게도 지금 이 사무실의 풍경을 200년 전에 이미 예견한 듯하다.
책장을 넘기자, 붉은 펜에 난도질당한 김 대리의 마음을 꿰뚫는 문장이 나타난다.
"타인의 시선에 사로잡힌 자는 불안 속에 영원히 갇혀 산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명예욕을 ‘타인의 견해’에 목매는 어리석음이라 정의했다. 상사가 그은 빨간 줄은 그저 '보고서(종이)'에 대한 평가일 뿐, '김 대리(인간)'의 가치와는 하등 관계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 쉽게 그 둘을 혼동한다. 타인의 평가라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일그러졌다고 해서, 거울 밖에 서 있는 진짜 내 얼굴까지 일그러뜨릴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이 냉철한 철학자의 조언을 현실적인 처세술로 바꾸기 위해 AI에게 물었다.
"쇼펜하우어의 관점에서, 이유 없이 반려를 일삼는 상사의 심리를 분석해 줘."
AI의 답변은 김 대리의 자책을 무색하게 만들 만큼 명쾌했다.
AI는 상사의 행동을 '맹목적 의지'의 발현이라 정의했다. 부장의 짜증은 보고서의 논리적 결함 때문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불안과 스트레스를 해소하려는 충동적 에너지, 즉 '배설'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어 AI는 쇼펜하우어의 '고슴도치 딜레마'를 인용하며 냉소적인 조언을 덧붙였다.
"칭찬이라는 온기를 기대하며 상사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마세요. 가까워질수록 가시에 찔릴 뿐입니다."
결국 AI의 분석대로라면, 지금 김 대리가 겪는 모욕은 그의 무능함 탓이 아니다. 그저 상사라는 고슴도치의 가시가 곤두선 날이었을 뿐이다.
비가 내린다고 해서 하늘을 원망하거나 자책하는 사람은 없다. 상사의 분노 또한 피하면 그만인, 지나가는 소나기 같은 자연 현상으로 바라봐야 한다.
AI의 조언을 듣고 나는 오늘부터 '칭찬받으려는 욕구'를 파업하기로 했다. 나의 반란은 거창한 사표가 아니다. 상사의 인정에 목매지 않는 '냉소적 거리두기'다.
이제 상사가 반려 서류를 던져도 나는 상처받은 김 대리가 아니다. 대신 고슴도치를 연구하는 동물학자의 눈으로 그를 관찰한다.
'아, 오늘은 유난히 가시가 곤두섰군. 아침에 집에서 무슨 일 있었나?' 그를 이해하려 애쓰는 대신, 그저 비를 피하듯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보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라고. 직장도 마찬가지다. 반려(고통) 아니면 루틴(권태)이다. 한 번에 통과되면 로또고, 반려되면 기본값이다. 기본값에 내 영혼까지 다칠 필요는 없다.
이제 너덜너덜해진 보고서는 상처가 되지 않는다. 반려된 건 종이 쪼가리일 뿐, 나는 아니다. 회사 문을 나서는 순간, 나는 무능한 부하직원이 아니라 쇼펜하우어를 읽는 고고한 에세이스트로 복귀한다. 내 자존감은 결재판 위에 있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