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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희 Jul 13. 2017

참 이상한 일[1]

여행은 참 이상한 일이고, 그 이상한 일을 하기 위해서 매번 짐을 꾸린다

군인인 아빠는 많은 나라에 다녀왔다. 배를 타고 싱가포르나 하와이 같은 곳으로 ‘원양’이라는 것을 갈 때도 있었고 미국이나 독일 같은 나라에 1년씩 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돌아올 때면 아빠는 까맣고 네모난 비즈니스 가방을 들고 왔다. 번호로 잠그게 되어 있는 가방이었다. 아마 샘소나이트 가방이었을 것이다. 007가방이라 불리던 가방이었다. 많이 들어가지도 않는데 가방 무게만으로도 무겁고, 어깨끈도 없어서 늘 손으로 들어야 하는 가방이었다. 기업의 비밀 서류나 돈다발이 차곡차곡 들어 있을 것 같은 가방이었고, 액체 폭탄이 들어있을 것 같은 가방이었다.

돌아온 아빠가 가방을 여는 순간을 나는 고대하고 또 고대했다. 아빠도 보고 싶었지만 아빠가 가방 속에 담아온 외국의 물건들을 어서 빨리 보고 싶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시장마다 수입품 가게라는 것이 있었는데 외국 물건들을 잔뜩 쌓아놓고 파는 곳이었다. 외국 물건들은 참으로 알록달록했고 듣도 보도 못한 신기한 것들로 가득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수입품 가게에 모여 앉아 하루 종일 커피를 타마시고 수다를 떨다가 저녁밥 짓는 시간이 다가오면 국자나 보온병이나 영양제나 스타킹 같은 것을 하나씩 사서는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아빠의 가방 속은 꼭 그 수입품 가게의 축소판 같았다. 가방 안에는 커다란 허쉬초콜릿이라든지, 리바이스의 청바지, 안네 프랑크의 집에서 사 온 안네 프랑크의 일기, 런던의 2층 버스 모형, 네덜란드의 풍차 모형, 독일의 맥줏집에서 긁어온 종이로 만든 맥주받침, 그 외에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장식품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꼭 요술 가방 같았다. 저 많은 것들을 하나씩 사들이고 모으면서, 귀국 전날 그것들을 저 가방 속에 꽉꽉 채워 넣으면서 아빠는 얼마나 들뜨고 뿌듯했을까.


다른 나라에 대한 아빠의 호기심은 가족에 대한 미안함을 억누를 정도로 컸다. 비행기를 타고 외국에 간다는 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아빠로서는 상상조차 못했던 엄청난 행운이고 기회였을 것이다. 한국에서 쪼들리면서 살아가는, 외국 따위는 꿈도 못 꿀 가족에 대한 미안함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을 아빠는 그 작은 물건들 하나하나를 사고 모으면서 조금씩 떨쳤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빠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고 산 사람이라서 좋았다. 내 기억에 아빠는 늘 즐거워보였다. 죽지 못해 사는 얼굴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즐거운 일들을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다 하고 살았다. 혼자서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려고 했다. 그건 아빠가 특별히 가정적인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남과 같이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돌아오면 아빠는 동네 사람들을 비좁은 우리 집에 초대해서 슬라이드 영사기에 찍어온 필름들을 넣고 벽에 쏘아 작은 상영회를 열었다. 거기에는 그때의 우리가 상상도 못했던 풍경들이 있었다. 기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찍은 들판 위의 풍차와 맥도날드 햄버거 가게와 런던의 새빨간 2층 버스와 깨끗한 지하철과 동화에나 나올 것 같은 예쁜 집들과 푸짐한 미국식 식사와 노란 머리에 키도 크고 코도 큰 외국 사람들이. 사진 속 도시와 사람들과 심지어 사진 속 아빠조차도 같은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요즘도 아빠는 우리가 친정에 갈 때마다 여행지에서 찍어온 디지털 사진들을 TV에 연결해 보여준다. 이제 더 이상 나는 그 사진 속의 나라들이 신기하지 않다. 나도 다 가봤으니까. 심지어 디지털 사진의 시대가 오면서 아빠의 사진 찍는 실력은 점점 더 퇴보하고 있는 것 같다. 의미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사진들이 태반이다. 대개 이런 식이다.


1. 도대체 누구를 찍은 건지 알아볼 수 없는 사진

2.무언가를 하고 있는 엄마 (대개 찍는 사람의 눈높이에서 성의 없는 구도로 카메라를 들이대 얼굴이 모아이 석상 부럽지 않게 크거나, 눈을 감고 있다.)

3. 정체를 알 수 없는 돌무더기 따위를 붙잡고 있는, 같은 표정의 사진 연작

4. 값싸고 맛 좋은 음식의 향연(과 기뻐하고 있는 아빠의 얼굴)

5. 사람은 블루스크린 앞에서 찍은 뒤 마치 배경만 합성한 것 같은 사진


우리는 점점 지겨워지기 시작한다. 하품을 한다. 딴 얘기를 한다. 결국 내가 참지 못하고 말한다.

“이제 그만 보면 안 돼?”

누구라도 1, 2, 3, 4, 5의 사진을 한 시간째 보고 있다면 같은 소리를 할 것이다. 아빠는 어색하게 웃지만 기분이 상한 것이 전광판처럼 얼굴에 다 드러난다(그리고 나는 아빠를 닮았다). 아빠는 상영회를 조속히 마무리한 뒤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엄마는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려 애쓴다. 엄마가 10여 년 전에 암에 걸린 것도 이해가 갈 만한 일이다.


아무튼 대학생이 된 내가 고등학생인 남동생을 데리고 첫 해외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아빠는 본인이 더 흥분하고 들뜬 모양이었다(사실 우리 아빠는 잠잘 때 빼고는 늘 흥분하고 들떠 있다. 엄마의 진단으로는 성인 ADHD). 아빠는 우리를 끌고 백화점에 가서 배낭을 골랐다. 아빠는 50리터짜리 배낭을 권했다. 내가 보기에는 지나치게 커 보였다. 에베레스트 등반에나 필요할 배낭이었다. 아빠는 버너와 코펠과 라면과 쌀과 김치와 생수병을 넣어 가려면 이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나는 버너와 코펠과 라면과 쌀과 김치와 생수병은 필요 없다고 했다. 밥은 사 먹을 거라고 덧붙였다. 여행의 묘미는 뭐니 뭐니 해도 현지 음식 체험이 아니던가.


아빠는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아빠의 경험상 호텔방에서 몰래 버너에 불을 붙여 코펠에 지은 밥에 통조림 깻잎이나 김치, 고추장으로 끼니를 때우지 않는 것은 여행이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엄마와 파리에 갔을 때도 코펠에 밥을 지어 먹거나 슈퍼마켓에서 산 빵과 맥도날드 햄버거로 연명했다고 했다. 나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아빠의 설득에 못 이겨 나는 50리터짜리 배낭을 샀다. 아빠가 권해서 복대도 샀다. 아빠는 늘 그러듯 지나칠 정도로 세세하게 복대의 사용법을 설명해주었다. 바지 밖이 아니라 꼭 바지 안에 넣어야 한다. 여권과 항공권과 복사본과 귀중품은 꼭 여기에 넣어두어야 한다. 한시도 몸에서 떼어놓아서는 안 된다. 심지어 샤워할 때도 가지고 들어가야 한다.


해외여행이 처음인 나는 아빠의 말씀을 받들어 그 복대를 허리춤에, 그러니까 속옷과 바지 사이에 꼭 차고 다녔다. 원래도 아랫배가 나왔는데 이제는 거의 임신 5개월 수준으로 배가 나와 보였다. 복대에서 뭔가를 꺼낼 때마다 어린 시절 자주 보던 할머니들 중 한 명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거스름돈을 거슬러주거나 용돈을 줄 때 바지 속으로 손을 넣어 안에 달아둔 주머니를 더듬거리며 찾던 그런 할머니들 말이다(가끔은 손이 허리춤과 가랑이를 지나 거의 무릎 안쪽까지 들어가기도 했다).


게다가 열대의 기후에 복대까지 하고 다니려니 나중에는 허리춤에 땀이 차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빠의 경고대로 태국 국민의 절반 이상이 소매치기인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내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당연한 얘기지만) 내게 큰돈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중에는 복대를 풀어 배낭 안쪽에 고이 넣고 다녔다. 그 여행 이후로 수없이 여행을 다녔지만 소매치기를 당하거나 여권이나 지갑을 잃어버린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운이 좋았다. 그 복대는 첫 여행 이후로 단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다.


떠나기 전날 밤, 방에서 짐을 꾸리고 있는데 아빠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한 손에는 버너를, 한 손에는 부탄가스를 든 아빠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물었다.


“진짜 안 들고 갈 거냐?”


떠나는 날 아침, 김포 공항에서(그때는 인천 공항이 생기기 전이었습니다)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는 이런저런 상투적인 당부의 말을 지나치게 세세하게 한 후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런데 생수는 챙겼냐?”


그로부터 5년 후, 엄마와 둘이서 태국 여행을 갈 때 아빠는 500밀리리터 생수병을 체류일의 수만큼 배낭 가득 채워갔다. 물은 역시 삼다수라면서. 다행히 버너와 부탄가스는 가지고 가지 않았다. 그것까지 챙겼더라면 아빠는 테러범으로 검거되어 지금껏 귀국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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