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특별한 이벤트를 행복이라 여기는지도...
간만에 관악산 초입 바위에 누웠다.
살랑살랑 바람에 나부끼는 연초록 나뭇잎 사이로 가는 햇살이 비치고 있다.
지난 밤의 아수라장 같던 쓰린 마음은 이미 온데간데 없이 자취를 감췄다.
지난 밤 내 기분 내키는대로 하지 못해 성났던 마음은 지금 어디쯤 있을까?
간사하기 이를데 없는 내마음.
관악산 초입에서 열무국수 한사발을 들이키고 올라 왔지만 금세 또 배가고파 집에서 가져온 새빨간 사과 한개와 포도를 계곡 물에 씻어 먹었다.
배가 부르니 근심이 사라졌다.
배고프면 근심이 깊어지고, 추워도 근심이 깊어지는 나는 그런 인간이다.
이런이런 물을 너무 많이 먹은 탓인지 오줌이 마렵다. 나도 명색이 여잔데 아무데서나 오줌을 눌 수는 없고, 어쩔까 고민하다 산속 수풀 바위 뒤에 실례를 하고 내려오니 더 시원해졌다.
역시 배부르고 공기 좋고 춥지도 덥지도 않고 뱃속까지 편안하니 여기가 곧바로 지상낙원 무릉도원이 됐다.
늘 지금 여기를 지루해 하거나 벗어나고 싶어하거나 좋아하거나 이 셋 중 하나 밖에.. 선택지가 다양하지 않았던 나의 일상.
어딜가면 그 곳을 벗어나 저길 가고 싶어하고, 막상 저길 가고 싶어 저길 갔건만 그렇게 원해서 찾아간 그 곳이 싫다며 또 다른 곳을 동경하고...
늘 일상에 염증을 느끼며, 특별한 무엇을 그리며 살던 내 모습...이 점점 옅어지고 있는 건지도...모르겠다.
그렇다면 꽤 희망적인걸...ㅎㅎ
짜릿하고 농익은 러브 스토리를 갈구하고, 달콤 쌉싸름한 풋사과 같은 풋풋한 설레임을 기대하고 사는 사십 중반이 가까워지는 대책없이 비현실적인 나란여자.
이 여자는 곧 죽어도 의리.
쌀 한톨 없어도 로맨틱.
쥐뿔도 없으면서 기부를 하는 상 푼수 중 한사람이다.
그런데 이 여자도 가끔은 지금 여기를 즐길 때가 있다.
대부분은 여기 있으면서 여기 아닌 어딘가를...그리워 하느라 현재를 살지 못하지만.
똥을 누면서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를 생각하거나
은희언니를 만나면서 지원언니 만날 생각을 하거나 그런 식이지만...지금은 온전히 몸도 마음도 여기 있다.
똥누면서 다른거 먹을 생각하고 이사람 만나면서 다른 사람 생각하고 그러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나는 한꺼번에 여러 가지 생각을 효율적으로 하는 멋진 여자라는 자화자찬까지 동시에 하는 나란여자.
이 여자 이대로 놔둬도 괜찮은걸까요?...
어쨋든 일상에 행복이 따로 있는건 아닌듯 별일 없는 지루한 일상이 행복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