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인가 착각인가?
난 내가 늙음을 혐오하는 줄만 알았어.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늙음이 싫은 이유야 말해 무엇하냐 싶겠지만 그래도 늙음으로 빠르게 내달리고 있는 내 입장에서 이 문제를 그냥 모른척 얼버 무리기엔 결코 작지 않은 의미를 가진 늙어간다는 것에 대해 얘기해 보고 싶어.
얼마전 내 심리상담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
"태연씨,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나요?"
나는 망설임 없이 곧바로 대답했어.
아뇨. 지금이 제일 좋아요.
통증이 함께 붙어 있는 부실한 몸에 우울증을 앓고 있지만 그럼에도 전 생애를 통털어 지금이 가장 좋아요.
물론 미래가 허락 된다면 그때는 또 어떤 생각이 들지 모르겠지만......지금으로선 지금이 가장 나아요.
점점 기능이 떨어지고 약해지고 아픈 곳이 늘어나는 몸뚱아리로는 지금 하는 일들을 해서 생계를 유지하기도 어려울테니 무슨일로 먹고살까 싶어 막막하기도 한게 사실이고 내 걱정의 9할은 모두 먹고 사는 것에 몰려 있지만...그런 불안이 있는 걸 인정하면서도 나는 이보다 젊을때는 결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지금은 느끼고 누리며 살고 있으니 이 정도면 꽤 괜찮다 싶다.
내 얘길 듣다보니 우울이라며 우울증 맞아?
이런 의문이 드는 사람도 있겠지.
그래 나 우울증 맞아. 얼마전까진 약도 매일 먹었었거든.
근데 우울증이긴 하지만 예전 우울증과 양상이 달라진 점이 있어.
전에는 내가 나인게 싫었고 희망이 없었고 그렇게 느꼈었다면 지금은 내가 나 마저 못 본척 외면하고 포기해 버리면 그것만은 정말이지 너무 슬플거 같아서 내가 나를 좀 이해해보려 노력하기 시작했다는게 전의 우울증과 다른 점이야.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나를 안고 함께 가기로 했거든.
내가 어떤 모습이더라도 나 만큼은 내 옆에 있어 주기로 한 다음부터 우울증이 있지만 좀 견딜만해진 것 같아.
아! 늙는 것이 싫지 않게 느껴지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었지.
그럼 다시 이 얘길 해보자고.
젊을땐 팔팔한 에너지 덕에 밖의 쾌락을 쫓느라 지칠 때가 많았었고, 그럼에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 탓에 패배자의 기분을 자주 느끼곤 했었어.
물론 젊은 기운은 내가 뭐라도 된 것인 양 착각하게 만들기 충분했고 불나방 마냥 나대다 보니 어느덧 중년이 되어 버리더라고.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패기로 이것저것 해보고 기웃거려도 보았지만 언제나 구멍뚫린 독처럼 채울 수 없는 욕망 덩어리가 늘어만 가는게 젊은시절의 내 모습이었어.
그땐 그랬었어.
뭔지 모를 불안감을 뒤로한채 즉시 취하고 싶은 것만을 보고 쾌락을 쫒는 불나방..
후회와 반성이 반복되며 기운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그런 삶의 연속을 이어갔지.
그런데 그땐 잘 몰랐어.소소한 행복이 뭔지?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자긍심이 뭔지?
사실 난 조금 노력 하고서는
왜 나는 내게는?
늘 원하는 만큼의 충분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 거냐며 타박과 불평으로 지낼때가 많았었어.
함께 다같이 누리고 나누는게 나를 더 풍요롭게 해줄 수 있다는 것도 몰랐었고 그런 즐거움을 느껴보지도 못 했었어.
내가 어떤사람인지? 내가 뭘 할때 좋아하고?뭘 할때 힘들어 하는지?그런 거 다 몰랐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 나였어...
내 안의 나 자신과 얘기를 하게 되고 나를 알아가는게 뭔지도 몰랐는데.
나를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면서 타인이나 가족과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따뜻하게 되더라고.
늙음이란 것은 조금 더 뭔가를 이해할 수 있는 힘이 늘어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날 이해하는 능력이 늘어나고 그럼 저절로 세상도 이해할 수 있고 포용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아. 화를 예로 들자면 화가 안나는 건 아니지만 화를 내는데 기운을 써버리면 다른데 쓸 에너지가 부족하단걸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상대를 먼저 이해해 보려는 지혜가 생기는것. 그게 노화가 아닐까 싶어. 아니면 기운이 떨어져서 화를 낼 수 없을 때도 있고, 노화의 시작과 더불어 좀 더 어릴땐 알 수 없었던 생명이나 자연현상의 신비도 마음으로 볼 수 있게 됐고 그래서 이제사 나는 사계절을 누리게 됐거든.
전엔 사계절을 교과서로만 배웠었지.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있어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느끼지 못하는 자에게는 없는 거더라고.
이건 나만의 노화에 대한 생각이지만 어쨋든 간에... 난 아마도 노화에 대한 거부가 점점 옅어 질지도 모르겠어...노화가 자연현상이니 받아들여라 라는건 솔직히 폭력 같아.
선택할 수 없이 정해져 있는것이니까.
그런데 점점 삶이 아기자기 해지는게 느껴지니까
그깟 젊음 부럽지 않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