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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규스케 Aug 14. 2020

동화 - <연대 꽃집>

가시가 있든 꽃을 못 피우든 어떤 모습이든 우리는 연대 꽃집의 구성원이다

동화 - <연대 꽃집>

“어머 이 꽃 봐. 색깔이 정말 쨍하고 예쁘다.” 화창한 4월의 어느 봄날, 그날도 어김없이 ‘연대 꽃집’엔 손님이 이어졌다. 대학가여서 그런지 청년들이 특히 많이 찾았다. 학생들은 주로 화려하고 싱그러운 꽃을 사 갔다. 장미, 튤립, 카네이션이 연대 꽃집의 이른바 선수였다. 이들은 꽃집에 오자마자 팔리기 일쑤였다. 한편 연대 꽃집 구석에는 잘 안 팔리는 식물이 있었다. 선인장이었다. 연대 꽃집에 온 게 지난 8월이니까, 벌써 9개월이나 구석에 머무는 신세였다.

손님이 모두 떠나고 가게 문을 닫은 밤 11시, 연대 꽃집에는 ‘식물 총회’가 열렸다. 회장인 ‘왕튤립’이 연설했다. 왕튤립은 연대 꽃집에 온 지 3개월 된 노란 튤립이었다. 잎이 크고 색이 선명해 전 회장인 네덜란드 튤립에게 간택될 수 있었다. 하지만 회장이 된 지 하루 만에 아기 손님한테 잎 하나를 뜯겼다. 남은 세 잎이 서로를 잘 감싸고 있어 언뜻 보면 왕튤립의 결점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왕튤립은 여전히 화려했다. 하지만 꽃집 사장은 결점이 있는 왕튤립을 손님에게 내주지 않았고 왕튤립은 3개월째 연대 꽃집의 회장을 맡아왔다.

왕튤립이 말했다. “자자, 주목 오늘 튤립 9송이, 장미 7송이 아, 카네이션은 몇 송이 나갔지?” 어제 들어온 카네이션이 말했다. “3송이요. 어제 들어온 동기들 다 나가고 저만 남았어요” 왕튤립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역시 잘 팔리는구먼. 기특해. 다육이들은?” 아가 다육이가 말했다. “저랑 제 친구 둘만 남았어요!” 왕튤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육이들도 선방했군” 왕튤립의 시선이 선인장에게 향했다. 눈에서 꿀이 떨어지던 이전과는 사뭇 다른 눈빛이었다.

왕튤립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선인장을 바라봤다. “선인장은 오늘도 저렇게 먼지 쌓인 채로 있네. 꽃도 없고 가시만 가득한 거 좀 봐. 쯧쯧.” 선인장은 굴하지 않고 말했다. “내일은 꼭 팔릴 거예요!” 카네이션이 혼잣말을 했다. “선인장 선배는 눈치가 없는 건지 멍청한 건지... 꽃도 없고 가시 달린 선인장을 누가 사 간다고.” 왕튤립의 연설이 끝나가자 식물들은 흠흠 목을 가다듬으며 노래 부를 준비했다. 항상 총회의 마지막 순서는 식물들의 합창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식물들은 목청 높여 노래를 불렀다. “연대 꽃집엔 예쁜 꽃들만 있지~ 내일은 꼭 팔릴 거야~ 왜냐면 내 꽃은 예쁘니까~” 선인장은 제 목소리가 묻힐세라 목청을 힘껏 높였다.

한 달이 지난 5월의 어느 봄날, 선인장은 몸이 가려웠다. 특히 머리 쪽이 가려웠다. ‘왜 이렇게 가렵지?’하고 생각하던 찰나, 연대 꽃집 주인이 선인장을 번쩍 들었다. “선인장아~ 이제 드디어 꽃을 피우는구나! 5월에 핀다고 해서 쭉 물주며 기다렸는데 이렇게 예쁜 꽃을 피우다니 정말 대단해!” 주인은 선인장을 거울 앞에 두고 선인장과 함께 셀카를 찍었다. 그 순간, 선인장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봤다. 여전히 온몸에 가시가 있었지만, 머리 위쪽에는 꽃이 피어 있었다. 선인장은 눈물이 날 뻔했으나 꾹 참고 사진을 찍는 데 집중했다. 잘 찍히기 위해 온몸을 꼿꼿이 세우며 꽃에 힘을 줬다.

그날 밤 열린 식물 총회에서 선인장은 단연 화젯거리였다. 어느덧 성장한 다육이가 말을 건넸다. “선인장 선배! 꽃 정말 예뻐요. 주인이 같이 셀카도 찍고... 정말 부러워요. 여기 식물들 모두 한 번도 주인과 셀카 못 찍어봤는데... 선인장 선배가 이제 회장 해야 하는 거 아녜요?” “옳소! 옳소!” 식물들이 외쳤다. 왕튤립만이 조용했다. 한 달이 지나도록 팔리지 않은 왕튤립의 이파리는 봄이 끝나가면서 점점 시들고 있었다. 남은 세 잎이 벌어지면서 뜯겨나간 이파리 하나의 부재도 이전보다 더 크게 보였다. 생생하고 큰 이파리가 점점 말라가는 것을 보며 왕튤립은 자신감을 잃은 지 오래였다. 휘황찬란한 꽃들 앞에서 연설하는 자신의 모습에 자괴감을 느끼면서도 그저 이 모습으로 꽃들 앞에 설 수 있어서, 연설이 좋아서 회장직을 이어오고 있었다.

왕튤림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그래. 오랫동안 고민했어. 나는 이제 볼품없는 외모니까 회장직을 넘겨야 한다고. 이런 말라 비튼 모습으로 연대 꽃집을 대표할 수는 없겠지” 왕튤립은 울먹였다. 선인장이 말했다. “아니요! 회장은 왕튤립이 해야 해요. 왕튤립은 식물들의 현황 체크를 누구보다 정확하고 빠르게 하는걸요? 연설 들을 때마다 왕튤립 실력에 놀란다고요. 잎이 조금 시들든, 잎 하나가 없든, 가시가 돋든, 꽃을 영원히 못 피우든 어떤 모습이든 우리는 연대 꽃집의 구성원이에요. 어떻게 생겼든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 있어요”

다른 식물들도 거들었다. 보라 튤립이 말했다. “나는 진보라색이었다가 연보라색으로 색이 좀 빠져서 슬펐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파스텔톤이라고 더 좋아하던걸? 난 연보라인 내가 좋아” 비누 장미도 거들었다. “나는 비누 장미로 태어나 항상 생화가 부러웠어. 그래도 사람들의 피부를 씻겨줄 수 있다는 나만의 능력이 있으니 얼마나 좋아” 하나둘 고백이 이어지자 왕튤립은 참았던 눈물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모두가 왕튤립을 쳐다봤다.

“난 꽃이라면 무조건 예뻐야 한다고 생각했어. 지금껏 그런 꽃들만 팔리는 세상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생각은 나를 옥죄었어. 새롭게 들어오자마자 팔리는 튤립들을 매일 마주하면서 꽃잎 하나가 없는 내 모습을 매일 밤 원망했고 몰래 울었어. 그런데 이파리마저 시드는 날 보며 이제 팔리기는커녕 연설도 할 수 없을 거라는 걱정이 몰려왔어.” 왕튤립은 선인장을 보며 말했다. “선인장아 정말 미안하다. 사실 너에게 한 말은 나를 향한 말이었어. 꽃잎이 없는 상태로 어떻게 팔릴 수 있겠냐는 생각이 계속 들고 차마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애꿎은 너에게 험한 말을 한 거야. 정말 미안해” 선인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 괜찮아요. 왕튤립! 눈물 뚝 그치고, 앞으로도 연설 쭉 해주실 거죠?” 왕튤립은 눈물을 닦으며 고맙다고 대답했다. 식물들은 왕튤립과 선인장을 향해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휘영청 밝은 달빛이 연대 꽃집의 통유리창을 뚫고 식물들을 비췄다. 어느덧 식물 총회가 끝나가면서 식물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노래를 부르려고 준비했다. 선인장이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여러분, 우리 노래 가사 바꾸는 것은 어때요?” 다육이가 관심을 보였다. “오오 어떻게요?” 선인장은 목을 가다듬었다. “제가 부를 테니 한 소절씩 따라 불러주실래요?” 식물들은 좋다고 환호했다. 선인장이 노래를 시작했고, 식물들은 한 소절씩 따라 했다.

“연대 꽃집엔 다양한 꽃들이 있지~” “연대 꽃집엔 다양한 꽃들이 있지~”
“꼭 팔리지 않아도 돼~” “꼭 팔리지 않아도 돼~”
“왜냐면 난 내가 좋아~” “왜냐면 난 내가 좋아~”
“내 모습이 좋아~” “내 모습이 좋아~”
“노래를 부르는 이 순간이 좋아~” “노래를 부르는 이 순간이 좋아~”

연대 꽃집에 노래가 울려 퍼졌다. 다양한 꽃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꽃들이 연대하는 순간이었다. 달빛은 여전히 꽃들을 비추고 있었다. 공연하는 가수에게 조명을 비추는 것과 같이. 그 조명은 특정한 꽃이 아니라 모두에게 닿았다.

꽃이 핀 선인장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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