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부모님의 세대가 사라졌다. 한 시대의 막이 내려지듯, 그 부재는 깊은 적막을 남겼다. 한때 우리의 윗세대로 든든히 버티어주던 울타리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그 자리를 우리 남매들이 매웠다.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는 구조였지만, 견고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 울타리는 사실상 가장 연약한 형태였을지도 모른다. 부모 세대가 떠난 자리에 서 있는 남매들의 모습은 그래서 늘 위태로웠다. 든든한 기둥처럼 서서 서로의 공허를 메우며 부모가 우리에게 해주었듯이 아래세대의 울타리가 되었지만,
그게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났다고 균열이 생기는지…,
굴레를 깬 사람은 팔남매의 셋째인 시숙이었다. 75세의 그가 그렇게 빨리 세상을 등지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남매들은 시숙으로 인해 틀이 깨졌다는 사실에 불안해했다.
젊은 날에는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성숙으로 가는 과정이었지만, 예순을 넘으면서는 나이를 먹는다는 건 성숙이 아니라 죽음이 감도는 노년으로 가는 것이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더 깊은 지혜 대신 죽음의 그림자가 짙어지는 것이었다. 노년은 그렇게 갑자기 다가왔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도 언젠가 닥쳐올 종말의 그림자를 의식했고, 삶의 무게로 단단해지기보다는 이별의 예감을 품은 채 흔들리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부모님의 세대가 떠난 자리에 남겨진 남매들의 견고함에 불안은 소리 없이 스며들었고, 그 속에서 우리는 자기 차례가 올까봐 두려워했다. 남은 시간이 얼마일까는 계산해보지 않아도, 몸이 먼저 그 유한성을 알려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고 싶은 일은 많았다. 영원하지 않고 언젠가는 사라질 것임을 알기에, 매 순간의 선택 앞에서 망설여지거나 신중해졌다.
더구나 요즘은 세상마저 경제 균열, 정치적 갈등, 기후 붕괴, 예측 불허의 전쟁으로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생각이다. 한 세대가 사라진 자리를 다음 세대가 메우는 과정은 더 이상 안정된 질서로 이어지지 않았다. 빈자리를 메우려는 힘이 강하거나 약할 때 균열의 소리는 더 또렷했다. 마치 남매들의 견고함에 불안이 감돌 듯, 지금의 세계도 단단해 보이지만은 않는 것 같다.
나이 든 개인이 느끼는 불안이 시대가 느끼는 불안과 포개지고 있었다. 삶은 더 이상 개인의 서사가 아니었다. 전 세계가 공유하는 긴장과 두려움이다.
윗세대의 자리를 채우며 서 있는 남매의 단단함도 언젠가는 모두 무너질 것이다. 죽음 또한 외부에서 시작되지만, 관계망을 통해 내부로 전이된다. 균열은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 균열은 각자의 삶에 보이지 않는 불확실을 심었다. 그래서 견고해 보이지만, 동시에 불안의 연속이다. 이때 느끼는 모든 불안은 함께라기보다는 각자도생의 자기 점검이다. 균열이 생길 때마다 우리는 불안과 긴장으로 관찰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하는 그때그때의 삶의 응답이다. 모든 건 윗세대가 감당해냈던 일의 연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