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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예 Mar 10. 2022

빵굽는 버터

벌써 그 빵집의 빵 굽는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아요

1.

30년 후의 모습을 그려본 적이 있으세요? 저는 있습니다.





전 유명한 투리구슬이라 제 모습을 상상하는 게 어렵지 않거든요. 잠깐만 눈 감고 생각해도 선명하게 잘 보입니다. 음 보인다 보여!

거창한 명사로서의 제가 아니라, 그냥 스무스한 장면으로서의 제가요. 평일에는 아마 시키는 대로 성실하게 일을 할 테고, 주말에는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 밥을 먹고 (성격 상 오픈 시간에 딱 맞춰 가거나 미리 예약을 해두었겠죠) 햇빛이 좋다며 골목을 돌아돌아 산책을 하다가 이 근처에 기가 막히는 빵집을 안다며 신나게 가서 커피를 마시고 케이크를 먹다가 집 가서 저녁으로 / 내일 아침으로 먹을 거라며 빵 하나를 포장해 갈 것 같습니다. 얼려서 나중에 먹는다고 두 개를 살 수도 있겠네요. 지금이랑 옷차림이 크게 달라질 거 같지도 않고, 그저 머리가 좀 더 짧아지고 화장이 옅어지고 얼굴에 주름이 좀 더 지고, 지금의 저보다는 지금의 엄마랑 좀 더 닮아있는 얼굴이 되겠죠.


자 이제 눈을 떠 봅니다.

이 정도면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고 있군요. 벌써 그 빵집의 빵 굽는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아요






2.

기억에 남는 빵 냄새가 있나요? 저는 있습니다.





혼자 야심 차게 유럽 여행을 갔을 때이지요. 베를린에 도착하고 첫날, 조식을 먹고 부지런히 길을 나섰는데 거리의 날씨가 생각보다 을씨년스러웠습니다. 어리둥절한 병아리 여행객인 저를 두고 베를리너들은 다들 바삐 자전거 /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하고 있었지요. 7월에 갔는데 정말 거짓말 안 하고 다들 경량 패딩을 입고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이 말하면 다들 안 믿던데 진짜진짜입니다. ( / ㅅ \ 억울한 표정) 저는 제가 7월 호주라도 간 줄 알았지 뭡니까. 아무튼 그래서 여름옷만 챙겨갔더니 너무 춥고 어딜 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에라 모르겠다 일단 심신의 안정을 찾으러 빵부터 먹으러 갔습니다. 숙소 근처에 카페가 있는데, 구글맵에 보니까 시나몬롤이 맛있다고 칭찬이 자자하더군요. 아 시나몬롤은 못 참지


처음 걷는 유럽의 거리는 생각보다 쌀쌀했습니다. 한기를 떨쳐내려 어깨를 움츠리고 구글맵에 의존하여 카페를 찾아 걷다 보니 나뭇가지 뒤로 제가 찾던 카페 간판이 보였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커피 냄새와 갓 구운 빵 냄새가 났습니다. 맛집 탐지견처럼 냄새를 킁킁 맡고는 확신을 했습니다.

아 여기 맛집이다



평일 아침인데도 사람이 꽤나 많았습니다. 주문을 먼저 하려고 매대를 살펴보니, 시나몬롤이 있긴 한데 5-6개 정도의 종류가 있지 뭡니까! 살면서 그렇게 많은 종류의 시나몬롤을 보지 모댔습니다. 서툰 영어로 점원 언니에게 뭐가 제일 유명한지 이것저것 물어보고 애플시나몬롤과 카푸치노를 주문했습니다. 꽤나 내향적인 사람이지만 유럽의 카페 문화에 적응해보고자 빈 자리를 찾아 ‘일행이 있나요? 여기 앉아도 되나요?’를 용감히 물어보고 합석을 해서 앉았습니다. 주문한 빵과 커피를 받아 들고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보면서 이제 오늘 어디 가서 뭐부터 할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isfj 거든요. (그래서 어디부터 갔냐면 코스 가서 겉옷 샀습니다)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며 빵을 먹고 또 독일어로 대화를 하고 신문을 보고 책을 읽고 노트북으로 업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까지 저는 어느 정도 움츠린 채 긴장하고 있었는데, 허공 속에 붕 떠 있다가 이 순간을 기점으로 나의 여행 속으로 서서히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장면 자체가 제게는 베를린이었고 이 여행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시나몬롤 중 뭐가 제일 유명한가요? 커피 종류는 뭐가 있나요?

응대하는 점원 언니가 되게 친절했고 웃는 게 예뻤던 기억이 납니다. 사람 얼굴을 정말 기억 못 하는 편인데 그 순간과 장면과 얼굴과 표정이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이 나요. 시나몬롤은 사실 엄청난 맛까지는 아니었지만 아침에 갓 나온 따뜻한 빵이라 냄새가 아주 기가 막혔습니다. 빵 사이에 들어있는 사과조림을 찾아 포크로 이리저리 찔러보던, 카푸치노를 마시며 카페인의 힘으로 시차 적응을 해보려 애쓰던 그 순간의 모든 것이 좋았습니다.






아르바이트 중 다른 선배와 스몰토크를 하다가 독일어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독일어를 할 줄 아신다는군요!

오 가르쳐주실 수 있으세요? 배워보고 싶어요! 해서 둘이서 오손도손 포스트잇에 기초 단어들을 써 내려갔습니다.

아는 독일어 하나 있어요! 해서 제가 아는 그 어구를 포스트잇에 적었습니다. - zeit fur brot -  왜 이걸 검색해볼 생각을 한 번도 안 했는지 모르겠지만, 몇 년이 지나고 그제야 알았습니다. 그 빵집의 이름은 ‘ time for bread´ 라는 뜻이었다는 걸. 잊고 살던 순간이 그날 다시 생각이 났습니다.

이 내용을 적는 지금도 그 시나몬 냄새가 나는 것도 같습니다.




3.


자스민 케이크를 먹어본 적이 있나요? 저는 있습니다.







중어중국학과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중국에 관한 별의별 내용을 골고루 배우는 학과입니다. 그중 중국의 도시에 대한 수업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베이징과 상하이를 비교하는 수업이었는데, 베이징과 관련해서 기억에 남는 건 ‘후통’과 ‘사합원’이었습니다. (후통은 동네 혹은 골목이라는 뜻이고, 사합원은 후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축 양식의 하나인데 보통 단층 형태입니다.) 교수님은 베이징을 이해하려면 후통을 알아야 한다고 무척이나 강조를 하셨습니다(사실 수업 들은 지 몇 년 돼서 가물가물합니다. 아닐 수도 있습니다. 원래 전공생들은 자세하게는 잘 모르는 거 아니겠어요) 후통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도 다 같이 두 개나 보았습니다. 그 다음 학기에 중국으로 교환학생을 가서 베이징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 수업을 같이 들은 동기와 함께요. 이렇게까지 된 이상 저희는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읍니다. 후통이 뭐길래? 둘이 손잡고 같이 가보기로 했읍니다.


처음으로 간 후통은 이름도 모를 후통이었습니다. 아직까지도 모릅니다. 야경이 예쁘다는 스차하이 공원에서 밤 산책을 하고 숙소로 가려 지도에 지하철역을 검색하고 그대로 따라갔습니다. 스차하이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사람도 좀 있고 가로등도 있었는데, 가다 보니 점점 불빛이 줄어들었습니다. 맞게 가고는 있는데 엥 갑자기 후통으로 들어온 거죠. 큰 길가를 지나 어느 순간 가로등이 하나도 없더니 불빛이라곤 저희 핸드폰의 지도 화면과 골목 옆 집들에서 나오는 옅은 불빛과 창문 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실루엣이었습니다. 심지어 창문도 작았거니와 저 위에 달려 있어서 그림자라고는 사람의 목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골목에는 정말 사람이 하나도 없고, 아니 어두워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고, 소리라고는 집들에서 들리는 아저씨들의 중국어 뿐이었습니다(당연함 중국임) 엥 이게 후통이구나! 저 옆에 집들이 사합원이구나! 를 갑작스럽게 깨달았는데, 정말 핸드폰 없이는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서 저희는 잠시간 공포에 질렸습니다. 중국의 치안과 관련한 루머와 뉴스들이 삽시간에 머릿속을 잠식했고, 미친 듯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 후통을 지나 지하철역에 도착을 했습니다.

네.. 마음의 준비없이 처음으로 본 후통은 약간 갑작스러웠습니다.


두 번째로 간 후통은 다행히도 계획적으로 찾아간 곳이었습니다. 후통은 옛 베이징의 상징입니다. 옛 베이징이란? 곧 사라진다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서울도 그렇지만 베이징도 개발이 되면서 옛 후통의 모습이 사라진다며 교수님은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아마 제가 그 밤에 간 후통을 낮에 갔다면 교수님이 그리워하시던 찐또배기 후통이었을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좀 더 현대화된 후통이었습니다. 이미 개발이 진행되고 있어서, 한국으로 치면 익선동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아! 가격도 익선동이더군요!) 개조된 사합원에 아기자기한 카페들과 공방, 가게들이 들어서 있는 곳이었지요. 다행히도 이때는 낮이었고..! 햇빛도 좋아서 여유롭게 조용한 골목을 걸어 다녔습니다. 아침부터 이미 이화원를 한바퀴 걸은 터라, 걷다 보니 힘들어서 카페에 가서 잠시 쉬기로 했지요. 디저트도 하나 먹을까? 했는데 白雪라는 케이크가 있었습니다. 생크림케이크인가..? 하고 사장님께 여쭤봤는데 자스민 케이크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자스민 케이크…?



동남아 국가들도 꽤 가봤지만 어디에서도 자스민 케이크는 먹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 일단 먹어보자 하고 커피와 함께 자스민 케이크를 시켰습니다. 밑에는 바나나 잎 같은 데코가 깔려있고, 흰 케이크는 우유와 생크림 사이의 어느 중간 정도의 맛이었고 자스민 향이 났으며 위에는 젤리가 올라가 있었습니다. 기억이 잘 안 나긴 하는데 젤리에서도 향긋한 자스민 향이 났던 것도 같습니다. 자스민이라… 분명 베이징인데 동남아 정취도 약간 느껴졌습니다. 한 번에 두 개 국가 체험하기? 오히려 좋아.


크지 않은 카페의 입구 쪽 자리에 앉았습니다. 좁은 공간 덕에 사장님이 일하시는 모습도 볼 수 있었고 밖에 사람들이 지나가는 모습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음료로 저는 플랫화이트를 시켰고, 친구는 垃圾라는 커피를 시켰습니다. 한국어로 쓰레기 라는 뜻인데 아마 더티 초코..? 이런 느낌의 비주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사장님은 음료와 케이크를 갖다 주시며 케이크 먹는 법, 스레기 커피 마시는 법을 열심히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당시의 실력으로는 다는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냥 되는대로 먹었습니다 그것은 아쉬운 일입니다.




개인적으로 딸기 케이크와 당근 케이크를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살면서 먹어본 케이크 중 독특했던 케이크를 꼽으라면 후통에서 먹은 자스민 케이크를 꼽겠습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추가하자면 비엔나에서 먹은 자허토르테도 특이했습니다. 살구잼이 들어간 케이크는 처음 먹어봤거든요. 단맛의 극치를 느끼고 싶다면 비엔나에 가서 자허 토르테를 꼭 드셔 보십시오.

자허토르테입니다








4.

제가 그린 그림입니다

빵집에서 일해본 적이 있으세요? 저는 있습니다.






베이징으로 어학연수를 가려던 2020년 연간 계획은 코로나로 인해 엎어지고 말았습니다. 상황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면 출국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오판을 하고 무작정 휴학을 때린 뒤 코로나가 잠잠해지길 기다렸는데, 이게 웬걸 점점 악화가 될 뿐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돈이라도 벌어야겠다 싶어서 근처의 베이커리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빵냄새를 맡으면서 일하면 그래도 좀 즐겁게 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프랜차이즈는 아니었지만 꽤나 규모가 컸습니다. 6개월을 꽉 채워 일했는데, 제가 들어가기 전에 왔던 사람들은 2일 근무하고 도망가고, 일주일 일하고 도망가고 그랬습니다 그만큼 손님도 일도 많았다는 걸 얘기하고 싶습니다


빵집에서 일한다고 하니 친구들은 제가 빵을 만드는 일을 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요, 빵을 포장하고 썰고 커피를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그곳 빵을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쉬는 날에도 굳이 가서 갓 나온 앙버터를 사 올 정도로요. 케이크도 시식을 내놓는 곳이었는데, 케이크는 보통 한 판을 25등분 정도 해서 소주잔 정도의 종이컵에 시식으로 내놓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25분의 1이 아닌 17분의 1 정도를 제 몫으로 빼놓고 소주잔이 아닌 그냥 종이컵에 담아 ‘와 컵케이크당’ 하고 퇴근길에 집에 가면서 먹곤 했습니다. 횡령 같나요? 그렇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제 삶의 낙이었습니다.



빵을 먹을 줄만 알았지, 빵을 어떻게 파는지는 이 일을 하면서 처음 알았습니다. 빵집에서 일하면서 빵 하나에 얼마나 수많은 요소들이 결합되었는가 생각했습니다. 경영활동에 대해서 생각했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원재료부터 해서 배송과 반죽과 숙성과 오븐과 커팅과 포장과 진열 어쩌구 저쩌구.... 그 전 단계들을 아무리 잘 거쳐왔어도 마지막 단계 내 손에서 커팅 한 번 잘못하면 그 식빵은 못 팔게 되는 거니까.


빵을 배웠나요? 아니요 저는 인생을 배웠습니다 (당당)





5.

내일 아침으로는 프렌치 토스트를 해먹을 겁니다. 드립백 커피를 내려 곁들이고, 토스트 위에는 메이플 시럽을 뿌려서요. 30년 후의 저는 무슨 빵을 먹고 있을까요? 어찌 되었든 재밌는 여행을 하며 빵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을 쌓아가고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 코로나에 걸리지 않아서 냄새를 잘 맡는데요,


음 벌써 그 빵과 커피 냄새가 나는 것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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