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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글쓸러 Oct 29. 2020

그 때 그 마음, 지킬 수 있을까?

 강연을 할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해부실습 어때요? 어떤 느낌인가요?” 이 질문이 왜 가장 많이 나올까요? 아마, 해부실습이란 이름 자체가 주는 강렬한 느낌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아니면, 누군가의 시신을 해부한다는 일 자체가 상상되지 않아서 일지도 모릅니다.   


 제 의대 기억 중 가장 강렬했던 기억이 바로 해부실습입니다. 그 때 기억은 의사가 된 지금 이 순간에도 생생하게 떠올라요. 무엇보다 해부실습 마무리 후, 신체 기증해주신 분들을 위한 위령제는 제가 죽는 순간까지도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위령제 당시, 저는 제가 해부했던 분의 유골함을 유가족 분들에게 직접 전해드리게 되었습니다. 조의를 표하는 동기들 사이를 지나, 직접 유가족을 뵙고 유골함을 전해드렸을 때의 기분은 지금 떠올려도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좀 더 최선을 다하지 못한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스스로에게 자책감이 몰려왔습니다. 너무 죄송하기도 했습니다. 때론 피곤하다고 빨리 집에 가고 싶어 했던 순간들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동시에, 시신을 기증해주신 고인과 유가족에게 너무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인체에 대해서 제대로 공부 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합적인 감정과 생각들이 그 때 동시에 몰려왔습니다. 


 저는 다짐했습니다. “좋은 의사가 되자.” 최소한의 양심에 대한 다짐을 해부 실습을 통해서 하게 되었습니다.    

출처, Pixabay

 그 이후, 벌써 5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학생이었던 제가 어느새 의사가 되었습니다. 저는 과연 좋은 의사가 되었을까요? 위령제 때 가졌던 그 마음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까요?     


결국 변할 수밖에 없다 : 무너져 가는 초심    


 책 [선심초심]에 초심의 의미가 나옵니다.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첫 물음의 순수함을 초심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비어있고, 숙련자가 갖는 여러 가지 습관에 물들지 않는 상태, 어떤 가능성이든 받아들이거나 의심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모든 가능성에 열려 있는 상태 등 이 모든 걸 초심이라고 합니다. 

 ‘좋은 의사가 되자’는 바로 저의 초심이었습니다. 열정으로 환자를 돌보고 싶었습니다. 환자를 수많은 서류 중 하나가 아닌, 사람 그 자체로서 온전히 대하고자 다짐했습니다. 환자에게 공감을 잘하고 싶었습니다. 끝없이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도 지치지 않으며, 환자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으로 남고자 했습니다. 환자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늘 고민하며, 그를 바탕으로 대화를 잘 나눌 수 있기만을 바랬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제 초심을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학생에서 벗어난다고 의사가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의사가 되어서도 수많은 것들을 배웠죠. 학생 때 몰랐던 실무를 알아갔습니다. 청구 과정을 익혀나갔고, 소견서를 어떻게 써야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행정적 업무에 대해서 하나하나 배워나갔습니다. 

 학생 때 간접적으로만 느꼈던 책임감을, 현장에서 따끔하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익힌 지식을 현장에서 혼자 적용하려다 보니 긴장감이 확 몰려왔습니다. 토론을 하며 맞추던 때랑은 전혀 달랐습니다. 객관식 5개 중 하나를 고르던 것과도 차원이 달랐고요. 병원 수련 이전에 군대 복무를 하게 되었기에, 실제 경험이 1도 없었습니다. 저 혼자 모든 걸 책임져야 하는 법을 하나하나 익혀나갔죠. 

 그렇게 지내며, 첫 부임한 보건소에서 하루에 환자를 100명 가까이 봤습니다. 오전에 60명 씩 봐야하기도 했어요. 1시간에 20명씩, 즉 3분에 1명꼴로 본 적이 있네요. 저도 천천히 환자 분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밀릴수록 밖에선 아우성이었습니다. 빨리 대화를 나누면서 환자 분에게 필요한 일을 해내야 했습니다.    


 정말 조금씩,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저는 지쳐갔습니다. 하루에 많게는 100명의 환자 분들을 상대로 이해하고 공감하며 대화하기를 매일매일 반복했습니다. 그런 생활 속에서 정신적 피로감을 느꼈죠. 시간에 쫓기다보니 환자 분들을 제대로 이해할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일단 치료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어요. 대화도 잘 나눌 수 없었습니다. 흔한 안부 인사도 마음이 급한 나머지, 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우선적으로 환자 분의 건강만 고려하다보니, 환자 분 자체를 챙기지 못했습니다.     

출처, Pixabay

 지쳐갔고, 점차 무뎌져 갔습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제 초심을 잊기 시작했습니다. 첫 마음보단, 현재 제 자신을 지키는 데 급급했습니다. 쫓기듯이 살아가며, 제 안에서 하나 둘 무엇인가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5년 전에 가졌던 다짐을 저는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그 때 그 마음을, 지키기 위해선    


 책 [선심초심]을 읽었을 때 확 와 닿았던 문장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영원한 진리를 깨닫고, 변화 속에서도 평정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열반에 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객관적으로 모든 게 변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사실이지만, 주관적으로는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 때문에 고통스럽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초심은 반드시 꼭 지켜내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다짐을 유지해야만 좋은 의사가 된다고 제 스스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깨달았죠. 스스로 알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회피하고 싶었던 겁니다. 다짐이 변할 수 있다는 전제 자체를 나쁘다고 생각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그 와중에도, ‘좋은 의사가 되자’란 마음을 최대한 가져가고 싶습니다.  

 바쁜 현실 속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하고자 합니다. 독감 예방접종, 코로나 19 선별진료 업무 등을 하다보면 정말 정신없습니다. 이런 상황들을 인정하며, 그 와중에 저의 초심을 떠올리겠습니다. 그리고 환자 분들을 최대한 이해하고 공감하고자 노력하겠습니다.

 환자를 위해서 나쁜 의사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받아들이겠습니다. 대신 환자 분과 더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입장에서 받을 수 있는 배려가 무엇일지 조금 더 고민해보겠습니다. 

 끝없이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도 지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인정하겠습니다. 대신 제 자신을 빨리 회복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리 바쁘고 지쳐도, 환자 분들을 서류가 아닌 사람 그 자체로서 온전히 대하겠습니다.     

출처, Pixabay

 초심을 최대한 유지하고자, 저는 글을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앞으로의 변해가는 제 모습들을 계속 글로 남기고자 합니다. 책 [스스로 행복하라]에서 말한 것처럼, 제가 남긴 글들을 통해 제 자신의 삶을 계속 돌아보겠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그에 따라 변해가는 제 다짐들을 기록한다면, 훗날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요.     


 지금보다 나아지고 싶습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라도 지금보다 나아가겠습니다.    


 훗날, 위령제에서 다짐했던 그 마음에 부끄럽지 않도록 말입니다.         




네이버 블로그 : https://blog.naver.com/kc2495/222130079893


참고자료

1. 선심초심 / 스즈키 순류 / 김영사 / 2013

2. 스스로 행복하라 / 법정 / 샘터(샘터사) /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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