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한 여름이었다. 에어컨을 빵빵하게 켜고, 집 안에서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무한도전]을 보고 싶었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해야 했다. 그런데 왜 그러지 못했나? 나는 도대체 왜 뜨거운 땡볕 속에서, 그것도 열을 가득 머금은 비닐하우스에서 일하고 말았나? 파프리카 나무로 가득했던 그곳에서, 내가 한 일은 파프리카 나무를 치우는 거였다. 나무를 뽑았고, 수레에 실어서, 밖으로 옮기길 수없이 반복했다. 해도 해도 끝이 나지 않았다. 난생처음으로 100평짜리 땅이 그렇게 크다는 걸, 철저히 실감했다. 울고 싶었다. 너무 힘들어서. 하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몸에서 나올 액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온몸은 이미 땀으로 다 축축했다. 이온 음료를 몇 리터씩 마셨음에도 화장실을 가지 않았으니, 말 다 한 거 아니겠는가? 옷에서 땀내가 풀풀 났고, 근육은 아팠다. 이 상황 속에서, 나는 딱 하나만 하고 싶었다. 엄청나게 큰 소원도 아니었다. 바로 시원한 물로 샤워하는 것! 정말 그거라도 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21살 때, 겪었던 대학교 농활 이야기다. 농사라는 게 쉽지 않음을 깨달았다. 피부로, 뼈로, 혈관과 신경에까지 각인될 정도로 철저히 말이다. 그렇게 조금은 철이 들었던 20대 초가 엊그제였는데, 어느새 30대가 되었다. 시간 가는 게 빠르다는 걸 느끼는 요즘이다.
농사라 하면, 공중보건의사 시절 또한 떠오른다. 2년 차에 새로 옮긴 보건지소 뒤편에는 벼농사가 한참이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일하시는 분들을 매일 아침 마주했다. 하루도 쉼 없이 일했다. 비 오는 날조차 농사지으면서 살아가는 그들을 보면, 꾸준함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될 정도였으니까. 그들의 노력은 가을이 되어서야 빛을 발했다. 지소 뒤편 창문으로, 한가득한 벼의 모습을 볼 때면, 내 마음이 풍요로워졌다. 노란 색채의 수많은 벼가 가을바람에 흔들거리면, 왠지 모르게 편안했다. 한편으론, 벼들의 모습에서 뼈 빠지게 일하던 농부들의 축적된 노곤함도 느꼈다고나 할까?
농활 때, 그리고 공중보건의사 시절 덕분에 농사의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겪어보기도 했고, 옆에서 직접 목격했으니 말이다.
노동의 숭고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농업! 이런 농업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책이 있다. 그 책은 바로 [사피엔스]다.
책 [사피엔스]에서는 농업혁명을 역사상 최대의 사기라고 한다.
어? 농업이 사기라고?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분히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서 끝내면 너무 자극적이니깐 자세하게 말해보고자 한다.
사피엔스는 거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몇몇 동물과 식물의 삶에 투자했다.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씨를 뿌리고 작물에 물을 대고 잡초를 뽑았다. 좋은 목초지로 양을 끌고 가 잘 먹였다. 이런 작업을 하면 이전보다 더 많은 과일, 곡물, 고기를 얻게 되리라 예상했던 거다. 그렇게 하면 좀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여겼을 테다.
하지만 아쉽게도 예상은 빗나갔다. 농부들의 삶은 전혀 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렵 채집하던 시절보다 더 힘들고 불만스럽게 살아갔다. 더 많은 식량을 얻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식량을 풍족하게 얻었다는 말이 더 나은 식사. 더 많은 여유시간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심지어 경제적 안정도 쉽지 않았다. 여분의 식량이 생기니, 서로의 농산물을 빼앗고자 하는 움직임이 커졌으니깐. 최소한의 안전망이 잘 유지되지 않았다. 거기다 농업을 하며 디스크 탈출증, 관절염, 탈장 등 수많은 질환이 발생했다.
책 [사피엔스]에서 말하는 농업혁명의 핵심을 이렇게 말한다.
더욱 많은 사람을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 있게 만드는 능력.
한 마디로 농업혁명은 덫이라고 주장한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농업혁명을 깎아내리려고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농업혁명이 이루어낸 성과도 분명 존재한다. 밀 단위 토지 당 식량 생산을 늘렸기에, 호모 사피엔스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수 있었고, 이는 대규모 정치사회 체제의 바탕이 되었다.
단지, 인류가 좀 더 편하고 싶어서 내린 선택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을 뿐이다. 식량을 좀 더 마련하여 굶지 않고, 외부로부터 안전하길 바랐다. 그 목표를 위해 내린 결정이 농업이다. 하지만 생각과 다르게,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밭 갈고 물을 운반하는 등 더욱 힘들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거다.
책 [사피엔스]를 읽고도 농업에 대한 나의 시각이 바뀐 건 전혀 아니다. 여전히 숭고한 업이라고 여긴다. 단지, 새로운 관점으로 농업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게 놀랍기만 할 따름이다. 어떤 일이든 양면적일 수 있다는 걸,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된 계기였다.
궁금하다면, [사피엔스]를 한번 읽어봐라. 생각지도 못한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역사상 최대의 사기가 농업 혁명이라니! 참신한 관점이다.
참고자료 : 사피엔스, 2부 [농업혁명] / 유발 하라리 / 김영사 /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