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갈래! 제주도! 놀자, 놀자!”
제주도에서 일주일 홀로 여행할 때 일이었다. 주말에 친구가 합류하고 싶다고 강력히 어필했다. 혼자 돌아다니고픈 마음이 컸지만, 한편으론 같이 구경하는 것도 그 나름대로 기대가 되었다. 급작스럽게 약속이 잡혔고, 어딜 가면 좋을지 이리저리 서로 대화를 나눴다.
합류 이틀 전이었다.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제주도 관광지나 식당에 관해 이야기하겠지. 그렇게 여기며 받았던 통화에서 울음에 가득 찬 목소리를 듣게 되며,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미안하다. 갈 수 없게 되었어. 할머니가 ……. 돌아가셨어 …….”
당연하게도 친구는 제주도에 올 수 없게 되었다. 나만의 여행이 계속 이어졌지만, 슬퍼하던 그 녀석이 자꾸 생각나던 탓에,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더라. 여행 도중에 자주 통화했다. 그런 나한테 오히려 미안해하며 친구는 자꾸만 말했다. 괜찮다. 너무 신경 쓰지 마. 네 첫 홀로 여행인데, 그 시간을 충분히 즐겨야지! 그러니깐 자꾸 전화하지 말고. 그래도, 챙겨줘서 고맙다. 힘이 난다.
모든 걸 마무리했을 친구로부터 연락이 온 건 여행 마지막 날이었다.
“고생했다.”
“아니야, 계속 전화해줘서 든든했어.”
“이제 끝났지? 푹 쉬면서 마음 잘 추스르고 …….”
“어 ……. 사실,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어.”
“응???”
“화장터 예약하려니, 한참 밀렸데. 며칠 기다려야 하나 봐…….”
위의 이야기는 코로나19 확진 26만 명까지도 나오던 2022년 3월의 실제 이야기다. 2020년 1월 이후 2년 2개월 동안 코로나19 확진 누적 사망자는 1만 3,141명이다. 그중 35%인 5,083명이 3월에 들어 숨졌고, 이에 따라 3월 화장시설 화장 건수가 1,250여 건으로 늘었다고 한다. 최근 3년간 전국 62개 화장시설 하루 평균 화장 건수가 730여 건인 걸 감안하면, 두 배 이상 증가한 셈이다.
화장시설 이용이 급증하면서, 짧으면 4일장, 길게는 6일장을 치르는 경우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강제로 6일장까지 치러야 했던 가족 중 한 명이 내 친구였던 거다. 삼일장을 끝내고 휴식이 필요했던 친구에게 있어, 강제로 연장된 3일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표현은 절대 하지 않았다. 원래 그런 이였으니까. 하지만 그 녀석의 목소리로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다. 마음이 아팠다. 하물며 그의 가족들은 어땠겠는가?
시간이 꽤 흘렀지만, 6년 전, 나 역시 할머니를 떠나보냈다. 그때의 3일은 정말 힘들었다. 그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감정을 다독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던 건 물론이고,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에게도 긴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성립할 때까지.
소중했던 존재와 이별하게 된 것도 모자라, 강제로 연장된 시간 때문에 얼마나 더 괴로웠을까? 남은 이들이 느꼈을 그 감정을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할 자신이 없다. 그때 그들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말할 자격조차 없기도 하지만.
코로나는 생각 그 이상으로 겪어보지 못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문제는 끝날 기미도 보이지 않은 채 우리에게 다시 무언가를 줄지 모른다는 거다. 직접 겪어도 힘들 뿐 아니라, 동시에 어떤 시련을 줄지 알 수 없기에 두려운 그것들 말이다.
나는 병원이란 직장에서 일하기에, 코로나 환자들을 계속 접하게 될 예정이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이나 뉴스를 통해서 코로나로 괴로워하는 이들을 간접적으로 마주하게 될 거다. 솔직히 두렵다. 코로나19에 다시 감염되는 것보다도, 수많은 이들의 어려움을 곁에서 다시 바라봐야 한다는 사실이. 한 사람으로서 온전히 감당하기엔 어려운 일이다.
부디 모든 이들이 덜 아프고, 덜 고통스럽기만을 바란다. 코로나19를 생생히 겪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마음속으로 늘 비는 소박한 소망이다. 그 소원이 꼭 이루어지길.
PS.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요새는 이 명언이 너무나도 싫다. 코로나 때문에 말이다. 솔직히 증오스러울 정도다. 제발 이젠 THE END라는 용어로 이 모든 걸 깔끔하게 마무리하길 바란다. “끝나면 그냥 제발 좀 끝나자!”
참고자료 : https://www.hani.co.kr/arti/area/capital/103588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