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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글쓸러 Sep 05. 2022

31년 만에 처음으로 밤을 지새우다.

 “무슨 일 생기면 언제든지 깨워!” 


 웃으면서 자러 가는 인턴 동기의 표정이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었다. 세상을 다 가진 거 같은(?) 즐거운 표정에, 나도 미소를 지으며 “잘 자요. 형!”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마냥 따라 기쁠 수 없는 처지였다. 나의 상황에 적절한 노래 가사가 문뜩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나는 군대를 다녀왔다. 정확히 말하면, 대체 복무의 일환 중 하나인 공중보건의사로 37개월을 근무했다. 3월에 시작해서 4월 초, 중순에 제대하기 때문에, 인턴 근무를 5월부터 시작하게 된다. 소위 5월 턴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3월부터 시작한 인턴 동기들에 비해 늦게 출발하는 만큼, 5월 근무 전부터 미리 인턴 인계장을 숙지할 수밖에 없다. 동시에 4월 마지막 주부터는 동기들이 하는 인턴 업무를 옆에서 따라다니면서 사전에 익히게 된다. 그렇게 차곡차곡 준비한 끝에, 드디어 나의 첫 인턴 근무가 시작된 것이다. 바로 5월 1일에!      

공부 / 출처, Pixabay

 보통 밤에 당직을 서는 경우, 예를 들어 두 사람이 당직을 같이 한다면, 한 명이 밤새워서라도 일하고, 다른 사람은 충분히 자는 식으로 서로 협의한다. 물론, 다음에 같이 당직 설 때는 새벽을 맡았던 사람이 자고 말이다. 또한, 심폐소생술이나 환자 전원과 같이 혼자서 할 수 없거나 급한 일이라면 둘 다 깨어나서 일해야 하는 건 기본이다. 

 나의 첫 당직 날, 무슨 자신감으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오늘은 형이 주무세요. 새벽에 연락이 오면 제가 가서 일할게요!”

 이렇게 외쳤던 거다. 나는 가끔 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용기였던 걸까?       


 나의 제안 덕분에, 자정이 되자마자 자러 간 인턴 동기 형, 그리고 막상 말해놓고 마냥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나의 처지……. 왜 그랬던 걸까? 속으로는 엄청나게 울고불고 난리였다. 솔직히 말하면, 나 자신에게 쌍욕을 할 정도로 후회했다.      


 ‘나 정말 괜찮을까? 오늘 밤 잘 넘길 수 있는 거겠지?’    


 오전 12시로부터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밤이 되기만 해도 비몽사몽 하던 나는 그날따라 잠이 1도 오지 않았다. 왜냐고? 언제든지 나를 찾는 전화가 올 수 있으니까! 기껏 머릿속에 꾸겨 넣어놨던 인턴 업무 내용들을 잠결에 잊어버릴까 봐! 그리고 자다가 멍한 상태로 아무것도 못 하거나, 혹시나 실수할까 봐! A4 용지에 적으라고 하면 100장은 적을 수 있을 정도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근거가 그땐 참 많았다. 내 나름대로 말이다. 그만큼 수면 취하는 일조차 너무나도 두려웠던 거다.      


 하지만 잠을 피하기란 쉽지 않다. 의자에 앉아 인턴 업무 인계장을 반복해서 보던 나의 눈꺼풀이 점차 감기기 시작했고, 나의 두뇌는 어느새 나를 침대로 인도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나는 침대와 하나가 되었더라. 이거야말로 물아일체가 아닐까? 


 “안 돼! 멍청.. 아... 잠자며 안... 돼... 일어.... 나....”


 그러다 나의 세상은 블랙아웃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수면 / 출처, Pixabay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익숙한 음악 소리가 점차 들려오더라. 처음엔 되게 흥에 겨워, 그 노래에 맞춰 춤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몸을 흔들어댈수록 뭔가 잘못되었다는 이성적인 직감이 확 와 닿았다. 어디서 들었던 건데……. 이 리듬에 맞춰서 춤추면 안 될 거 같은데…….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면서 깨달았다! 


 “아!, 이거 전화벨 소리구나!”


 와장창! 꿈의 세계가 유리 깨지듯 작살나면서, 그렇게 현실로 돌아왔다.      

휴대폰 / 출처, Pixabay

 현재 시각은 새벽 3시! 꿈나라에서 갑자기 확 빠져나오면서, 1L짜리 커피를 순식간에 과량 복용한 듯 심장이 두근두근 뛰어댔다. 그때 내 맥박을 바로 측정했다면, 막 운동을 한 사람만큼 나왔으리라!

 계속 줄기차게 울리던 전화를 받자마자, 간호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ICU(중환자실)인데요! 응급 ABGA 부탁드려요.”

 Arterial blood gas analysis, 요약해서 ABGA, 한글 말로는 동맥혈 가스 검사라고 불리는 검사가 있다. 호흡곤란을 호소하는 환자의 산소 공급 상태와 산·염기 상태를 평가하기 위해, 때에 따라선 수술 전 환자 신체 상태 파악하고자 해당 검사를 시행한다.    

   

 막 일어난 상태라, 내 육체는 멀쩡한 듯 보였을지 모르지만, 수면에서 강제로 깨어난 두뇌는 여전히 맛이 간 상태였다. ABGA……. 어떻게 하더라……. 어떤 물품들을 준비해야지……?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어찌어찌 필요한 것들을 마련해놓고, ABGA를 하는 순서까지 다 떠올렸지만, 막상 환자의 혈관을 잡는 거 자체가 무섭더라. 학창 시절, 실기 시험 준비할 땐 망설이지 않고 자신 있게 주사기로 동맥을 찌르던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진짜 사람을 상대로 한다는 게 처음에는 넘을 수 없는 큰 벽처럼 다가왔다.

 맥박을 확인했다. 아주 팔딱팔딱 잘 뛰었다. 이것이야말로 동맥이지! 그렇게 철저히 체크하고 주사기를 찔렀다. 근데 왜 피가 안 나오는 거지……? 분명히, 철저하게 확인했는데? 내 뇌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건가? 내 손의 감각마저도 회복되지 않았나? 의문을 가졌지만, 별 소용없었다. 그렇게 실패하고 말았다.

실패 / 출처, Pixabay

 나에 대한 신뢰가 바닥까지 내려갔다가, 0.1초 정도 만에 정신을 되찾았다. 일단 지금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이 눈에 보이는데 어디 감히 허튼 생각 중인 건지! 다시 집중했다. 

 부끄럽게도 몇 번을 반복한 끝에야, 간신히 성공! 아무리 처음이라 해도, 내 실패도 부끄러웠지만, 그 과정 중에 환자가 느꼈을 고통을 떠올리면 너무 죄송하더라.  

   

 당직실로 돌아오니 어느덧 3시 반이었다. 다시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와 내가 하나가 되었고, 눈을 감았다. 그럴 때마다 이상하게 귀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리는 거 같았다. 깜짝 놀라서 휴대폰을 확인해보면, 전화가 분명히 오지 않았다. 5분에서 10분 간격으로 그런 일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새벽 4시 반! 

새벽 / 출처, Pixbay

 완전히 수면하고 싶은 충동과 잠에 빠졌다가 또 술기를 제대로 못 할까 봐 걱정하는, 이성과 욕구 사이 그 중간 영역에서 나는 계속 머물렀다. 걱정과 두려움으로 똘똘 뭉친 나의 이성이 결국 이겨버렸고, 정신을 차리고자 잠시 밖에 나가 새벽공기를 마시면서 걸었다. 그렇게 새벽 5시가 찾아왔다. 찬 공기 덕분에 교감 신경이 매우 활성화된 내 상태가 진정되는 방향으로 접어들면서, 당직실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잠들었다.     


 정말 잠깐이었다.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나머지, 화들짝 깨어보니, 인턴 동기 형이었다. 

 “너 괜찮아? 몰골이 왜 이래? 어젯밤에 급한 일이 많았어? 그냥 깨우지.” 

 나를 걱정해주는 동기와 마주하며 나의 첫 당직은 그렇게 끝에 이르렀다.      

아침 / 출처, Pixabay

 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오전 8시 반에 이르면, 또 다른 시작이다. 왜냐고? 당직이 끝나더라도, 정규 근무는 이제부터니깐…….    

 

 그때 정말 진지하고, 좀 심각하게 고민했다.     


 ‘나, 인턴 생활 괜찮은 걸까? 잘 할 수 있을까……?’

 ‘나한테 인턴 하지 말라고 말리던 동기들……. 그들의 말이 진심이었구나.’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걱정이 태산처럼 쌓였지만, 일단 생존이 우선이었기에, 잠시라도 눈을 붙였다. 정규근무 때도, 예상할 수 없는 일들을 마주할지 모르니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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