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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가 ‘역시나’다. 폴리 삽입을 끝내자마자, 추가된 인턴 업무까지 하고 돌아간 당직실에서 나는 목격하고 말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대참사를 말이다. 라면에 있어, 가장 끔찍한 최후가 무엇인지를 보고 만 것이다. 만약 라면에 생명이란 게 부여되었다면, 그가 겪었을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으리라. 그의 생생하고도 치욕스러운 모습을 유일하게 알게 된 나는 이 말밖엔 할 수 없었다.
그때, 확고하게 결심하고 말았다. 이렇게 된 이상, 그 녀석에게 사죄하는 의미로 오늘만큼은 다이어트를 확실히 포기하겠다고.
아까도 말했지만, 나에겐 이미 계획이 있었다.
이런 사태를 대비해서 라면을 또 사두었지. 후후후. 난 역시 천재군! 자 다시 시작해볼까? 스프 뿌렸고, 다시 물을 받으러 가 볼까나?
그 찰나, 또, 또, 또!!!! 또 전화가 왔다. 오늘 하루 동안, 라면 먹는 걸 막으려고 하는 이들이 왜 이리 많은 건가!
“선생님, 응급 ABGA요. 빨리요! 급해요.”
Arterial blood gas analysis, 요약해서 ABGA, 한글 말로는 동맥혈 가스 검사라고 불린다. 호흡곤란을 호소하는 환자의 산소 공급 상황과 산·염기 상태를 평가하기 위해, 때에 따라선 수술 전 환자 신체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고자 해당 검사를 시행한다.
인턴 하루 이틀 하는 거 아니니, 이 정도야 금방 해낸다. 준비하고 소독하고 동맥혈을 향해 찌르고 쭉쭉 올라오는 피를 확인하고, 지혈하면 끝? 이 모든 과정을 철저하게 하더라도 5분 컷이다. 인턴 초기만 해도 “업무 수행 능력이 늘긴 할까?” 고민했는데, 돌이켜보니 어찌어찌 계속하니깐 숙련도가 쌓이긴 하더라. 물론 쉽지만은 않았다만.
스프까지 뿌려둔 컵라면에 이제 뜨끈뜨끈한 물을 넣으러 갈까?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전화가 온다. 이거 글쓰기를 위해 지어 낸 거 아니냐고? 그랬으면 좋겠다. 나도 그 순간 믿고 싶지 않더라. 이렇게까지 쉴 틈이 없을 정도라니. 전화를 받았다. 뭐? 이번엔 혈액 배양 좀 해달라고?
이거 오늘 실화냐……?
진짜로 이게 현실 맞아?
꿈속은 아니고?
이쯤 되니 라면이고 뭐고 오늘 무슨 날인가 정말로?
어쩌겠는가? 오늘 당직이 나고, 그 일은 내가 해야 하는 거고, 전화가 왔으니 빨리 가긴 해야지. 고요한 새벽 2시 10분, 빠르게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문 인식을 통해 다른 병동으로 가고자 하니깐, 문제가 생겼다. 엘리베이터 이놈이 나를 거부한다!!!
“지문이 인식되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해주세요.”
다시, 다시, 다시, 다시, 또다시, 계속, 계속, 다시, 계속, 또다시...
안 된다. 왜 안 될까? 나 여기 직원인데. 나 이제 여기 사람 아닌가?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안 그래도, 라면을 눈앞에 두고 먹지를 못해서 화가 나는데, 엘리베이터 너마저도……?
지문 찍기, 실패, 다시 해 주세요. 지문 찍기, 실패, 다시 해 주세요...
약 10분 동안, 30번 정도의 지옥 같은 굴레 속에서 엘리베이터와의 분투 끝에야, 환자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진짜 안 되는 날은 뭘 해도 안 되는 게 맞긴 한가 보다.
배양 병의 뚜껑을 따고, 주사기를 찌를 배양 병의 주위를 소독한다. 환자에게서 대량으로 피를 뽑을 부위(약 20cc, 많이 뽑을수록 배양이 잘 되기 때문이다.)를 미리 체크한다. 주사기 또한 같이 준비한다. 오염되지 않게 멸균 장갑을 착용한 후, 피 뽑을 부위를 소독한다. 혈액 배양했을 때, 피부 상재균 등이 결과에 포함되지 않도록 하고자 소독을 정말 열심히 해야 한다. 그리고 피를 뽑는다. 10cc 정도. 이후 다른 부위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진행한다. 각기 다른 위치에서 뽑아야 좀 더 정확한 균 확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익숙해지고, 과정 자체에 숙달되더라도, 일정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업무가 바로 혈액 배양이다.
다 끝나고 돌아가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오는 거 같다. 불안 그 자체다. 라면에 손이 가면, 전화가 오는 게 오늘의 징크스인가? 그러면 라면을 먹지 말아야 할까? 다이어트 포기하겠다는 큰 다짐도 버려야 할까? 그래... 남들이 보기엔 헛소리처럼 보일 수 있긴 하지만, 오늘의 엄청난 법칙(?)을 고려하면 라면과 이젠 작별해야 할 거 같다.
잠이나 자자……. 내일도 일해야 하니깐…….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고요하고 어두컴컴한 공간 속, 그곳에서 전화기가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벌써 아침인가?
응. 아니야! 알람 말고, 콜이야 콜. 일이나 하라는 신호지.
목에 꽂힌 관을 고정하던 실밥이 풀려서 다시 봉합해달란다.
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
그래 가야지. 그리고 잠도 저 멀리 가 버렸다.
익숙한 소리에, 이젠 감흥조차 없다. 그 어떤 생각도 들지 않는다. 전화를 받기만 할 뿐이다. 멍하니 소리를 들었다. 이번엔 다른 환자다. 열이 갑자기 난단다. 혈액 배양이 바로 필요하다니 가야지. 가...야지...
그런데, 큰일이다. 혈관이 안 느껴지는데...? 잠을 못 잔 탓에, 내 손을 통해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와, 이러면 진짜 안 되는데……. 혈관을 찾아야 한 번에 피를 뽑아낼 수 있기에, 지금의 사태는 정말 위기였다. 그 위기는 자꾸 실패로 이어졌고, 그 탓에 필요한 만큼의 혈액을 뽑아내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피로)
이젠 진짜 잠 좀 자려고 가고자 했는데, 간호사 선생님이 다가와서 말하더라.
“선생님……. 오더가 나왔는데요……. 오전 6시에 L-tube(엘튜브)를 해야 해요……. 오신 김에 하고 가실래요? 아니면 좀 자다가 오셔서 할래요?”
허허허.
네네네.
걍 지금 하고 갈게요.
어차피 오늘은 라면도 버렸고, 잠도 버렸는데요. 뭐.
L-tube(엘튜브) 삽입은 비위관 삽관이라고도 하지만, 쉽게 말하면 코에다가 줄을 삽입하는 걸 말한다. 삼키기 힘들거나 의식이 없을 때, 식사 제공과 더불어 입으로 약을 드리고자 엘튜브를 삽입한다. 혹은 필요에 따라 위의 내용물을 제거하기 위해서 위까지 직접 닿도록 하는 비위관을 넣기도 하고. 키 큰 남성은 70cm, 키 작은 여성은 55cm, 평균 남성과 여성은 65-60cm 정도 넣어야 하는 등 어마어마하게 깊숙이 들어가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환자와 엘튜브로 사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협조가 되지 않는 탓에, 뺐다가 넣었다가, 뺐다가 넣었다 그 자체를 수십 번 반복한 끝에 성공하긴 했다. 해내고 나서 시간을 보니, 오전 6시가 되었다는 건 슬프고도 고달픈 현실이었지만.
당직실에 도착했다. 아까와 달리 햇살이 가득 들어와 밝기 그지없는 방이다. 그런 방 안에 덩그러니 누워있는 나는 현재 초주검 상태다. 제정신이 아닌 건 물론이고.
내 눈앞엔 스프가 뿌려진 라면이 놓여 있다. 이제 뜨거운 물만 넣으면 된다.
하지만 라면에 물을 붓고도 불어 터져서 못 먹고, 식어서 먹지 못하기도 했고 ……. 때론, 물 넣기도 전에 일하러 갔다.
이쯤 되면 부숴 먹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니... 라면이 눈앞에 있는데 왜 먹지를 못해!!!
잠도 잃고, 라면도 잃었을 때, 얻은 건 하나 있다.
뭐냐고? 일을 얻었다. 허허허.
전화가 또다시 울린다.
이번엔 무슨 일일까...? 엉엉엉엉엉....
라면이 눈앞에 있는데 먹게 해줘... 제발... 다이어트는 잠시만 좀 포기할 거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