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100
원래 인스턴트 라멘은 그릇에 면을 넣어 뜨거운 물만 부어서 먹는 음식이었다. 지금 감각으로는 인스턴트 라멘이라기 보다는 컵라멘에 가까운 느낌인데, 일본 최초의 인스턴트 라멘인 치킨 라멘이 물만 부어서 먹는 타입이라는 것을 알고 낯설었던 기억이 있다. 막상 최초의 컵라멘인 컵누들이 등장하는 것은 인스턴트 라멘이 등장하고 10년은 지난 뒤인 1967년의 일이었다.
그런데 인스턴트 라멘을 보고 컵라멘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는지 묘조 식품은 본격적으로 봉지 라멘을 발매하기 전인 1961년에 세계 최초의 컵라멘이 될 뻔 했던 '묘조 차슈멘'을 시험 적으로 판매한다. 그리고 망했다. 이 묘조 차슈멘이 왜 도전하고 실패했는지를 살펴 보면 본격적인 컵라멘이 등장하기 까지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는지 알 수 있다.
뜨거운 물만 부으면 되는 인스턴트 라멘에서 컵라멘을 떠올리는 것은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할 수 있는 아이디어였고 아마 묘조 식품 전에도 누군가 도전해 봤을 것이다. 하지만 상품화까지로는 이어지지 못했고. 묘조 식품도 상품화에는 실패했다.
원래 인스턴트 라멘을 그대로 넣으면 되니까 인스턴트 라멘 자체의 문제는 전혀 없었다. 묘조 차슈멘이 실패한 원인은 대부분 용기의 한계에서 나왔다. 묘조 차슈멘의 용기로는 당시에 아이스크림 용기로 쓰였던 파라핀을 입힌 종이 용기를 사용했다. 아이스크림을 담을 수 있는 종이 용기라면 컵라멘 용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실제로 뜨거운 물을 부어보니 라멘의 기름이 용기에 배어나오고 파라핀이 뜨거운 물에 녹아 맛에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차슈멘이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로 차슈와 죽순 등 건더기에도 신경을 썼지만, 동결건조 기술이 대중화 되기 전이라 건더기도 처음 의도한 것처럼 불어나지 않았다.
결국 해수욕장에서 한 번의 시험 판매를 끝으로 '일본 최초의 컵라멘'은 사라지고 만다. 당시 일본의 1회용 용기의 기술력이 컵라멘을 만들기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닛신 식품이 컵누들을 개발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 1967년에 미국에 가져간 치킨 라멘을 바이어들이 적당한 돈부리를 찾지 못해서 종이컵에 반쯤 부숴서 넣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생각해보면 그것보다 인스턴트 라멘을 견디는 종이컵 쪽이 더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싶지요. 건더기 문제도 1961년에는 해결 방법이 없었지만, 컵누들을 개발하는 1960년대 후반에는 비상식이나 휴대식량을 위한 동결건조기술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컵누들의 상징 같은 새우를 듬뿍 건더기로 넣을 수 있었다.
1960년대 후반에 인스턴트 라멘에 동결 건조 건더기를 넣는 것은 실험적인 시도라 일본에서는 컵누들의 등장을 식품의 동결 건조 기법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최초의 사례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