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요리의 패러다임이 바뀌다
인스턴트 라면에 들어있는 스프가 실은 수프(Soup)를 뜻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말 수프'를 줄여서 스프라고 부르는 셈인데, 라면 육수가 무슨 수프란 말인가? 그런데 일본에서는 라면의 육수를 수프라고 불렀다.
라멘의 기원을 이야기하면서 중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제대로 중국의 면요리를 제대로 이어받은 것도 아닌 데다 구성도 중국에서 찾아보기 어렵다고 했는데, 온전히 일본인의 창작요리라고 불러도 되지만 중국인의 눈에는 도저히 중국요리로 보이지 않는 라멘이 일본인의 눈에는 완전히 중국요리로 보이는 이유가 있다. 바로 육수(肉水)다.
한국에서는 국이나 찌개의 밑국물을 육수라고 부르는데, 말 그대로 소고기를 삶아서 우려낸 물이다. 지금은 흔한 멸치 육수 등이 등장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고 조선시대의 요리책인 '음식디미방'(1670년 경)을 보면 지금이라면 멸치 육수로 만들 요리도 소고기를 우려낸 육수로 만들 정도로 대부분의 요리가 소고기 육수가 기본이었다. 우리는 밑국물을 아예 육수(肉水)라고 부를 정도로 동물성 국물에 익숙했지만 일본은 동물성 육수가 거의 없었다. 콩을 발효해서 만든 된장과 간장을 많이 쓰는 것은 우리와 같았지만 소고기 육수의 문화가 없기 때문에 다시마와 가다랑어를 발효해서 만드는 가츠오부시가 다시(出し)의 기본이었다.
이 다시마와 가츠오부시는 일본 안에서도 오사카를 중심으로 하는 간사이 지방에서 많이 쓰고 도쿄를 중심으로 하는 간토지방에서는 간장을 더 많이 썼는데, 오사카가 물자 유통과 상업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홋카이도의 다시마를 비롯해서 가츠오부시 등의 재료를 구하기 더 쉬웠기 때문인데, 간사이 출신 개그맨이 도쿄의 간장 베이스의 검은 국물을 보고 '도쿄 사람들은 먹물에 우동을 말아먹는다'라고 놀리는 단골 레퍼토리가 있을 정도이다.
생선과 해초 그리고 된장으로 밑국물을 만들고 간장으로 간을 하는 것이 오랫동안 일본 음식문화의 전통이었는데, 이 전통을 라멘이 때려 부쉈다. 라멘이 중국 요리에서 가져온 일본 요리의 근간을 뒤흔든 개념은 바로 육수였다. 닭의 고기와 뼈, 돼지의 고기와 뼈로 만든 육수 자체가 일본 사람들에게 무척 낯선 맛이었다. 하지만 중국에서 돌아온 일본인 입장에서 고기로 만든 육수로 만든 라멘은 그렇게 낯선 맛이 아니었다.
라멘은 생선과 다시마로 낸 다시에 익숙한 일본인이 처음으로 만난 육수의 맛이었고, 절대로 일본요리가 아니었다. 얼마나 낯선 맛이었는지 라멘의 육수의 영어로 수프(Soup)라고 불렀다. 그래서 일본과 기술제휴로 만들어진 인스턴트 라면 덕분에 우리도 분말 육수를 스프라고 부르게 되었다.
라멘의 무엇보다 큰 특징은 그동안 일본에 없었던 동물성 육수가 바탕이라는 점이었다. 오랫동안 고기 맛을 몰랐던 일본인들이 드디어 육수에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미국이 원조해준 저렴한 밀가루를 바탕으로 폭발적 보급되면서 라멘이 일본을 대표하는 새로운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것이 라멘의 진정한 출발점이었다.
중국과 일본의 화교, 그리고 호떡집 불나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