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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날 Feb 05. 2021

호떡집에 불나다.

조선의 화교 이야기.

어수선한 분위기를 뜻하는 "호떡집에 불나다."라는 말보다 조선의 화교를 잘 설명하는 단어도 없다.

한국에 화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임오군란 때 청나라 병사 3천 명과 함께 들어온 40여 명의 청나라 상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임오군란의 결과로 청나라는 1882년에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맺게 된다. 중국 상인이 인천에서 무역을 할 수 있고 조선 상인도 베이징에 가서 무역을 할 수 있는 조약이지만, 조선 상인이 중국에 가서 무역을 할 능력이 없었으니, 중국 상인들만 인천과 서울에 와서 장사를 하기 위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19세기 말, 청나라 군대.

동남 아시아나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한 화교들이 쿨리(苦力)라는 육체 노동자로 시작한 것과 달리 조선에 처음 진출한 화교는 무역이 바탕이었다. 화교들이 대부분 광둥성, 푸젠성 출신인 것과 달리 조선 화교는 조선과 가까운 산둥성 출신이 대부분이었고,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중국과도 많이 교류했다는 특징이 있었다.

김정구의 노래 '왕서방 연서(1938)'을 들으면 "비단이 장사 왕서방'이 등장하는데, 실제로 중국의 상업 자본이 직접 투자한 주단 포목점이 중국의 비단과 삼베, 상해를 통해 들여온 영국의 면직물를 대량으로 수입해서 조선의 주단 포목 시장을 점령했다. 1930년에 전국의 화교 포목 상점이 2116개로 당시 조선의 전체 포목 상점 중 20%, 판매액은 30%였다고 한다.

김동인의 소설 감자(1925)에는 고구마(감자)와 배추를 키우는 왕서방의 채소밭이 등장하는데, 조선에 진출해 채소 농사를 짓는 화교의 숫자도 많았다. 이렇게 재배한 채소는 조선인보다는 구매력이 있는 일본인에게 더 많이 팔렸다.

조선의 대장간에서 만든 솥보다 얇아서 가볍고 저렴한 솥을 만들던 화교 주철공장 등 자본과 기술을 앞세운 화교는 점점 조선에 세력을 늘려나갔다. 임오군란 이후로 일제 강점기까지 화교 자본은 조선을 상당히 잠식했다.

화교가 현지에 진출할 때 육체노동으로 시작해서 중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노점을 여는 경우가 많았는데 조선에서는 호떡집이 기본이었다. 밀가루로 구운 빵 안에 설탕을 넣어 기름에 구워내는 호떡은 무역을 바탕으로 하는 조선 화교만이 가능한 일종의 반칙이었다.

쌀과 밀의 농사짓는 기후가 다르기 때문에 쌀이 주식인 조선에서는 밀가루가 귀하기 마련이다. 고려도경에 고려에서 제사에 쓸 유밀과를 만들 밀가루를 송나라에서 수입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밀가루로 만든 국수는 누가 결혼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은 먹기 힘든 귀한 음식이었다.

조선은 밀가루만 귀한 것이 아니었다. 더운 곳에서 자라는 사탕수수도 추운 곳에서 자라는 사탕무도 없어서 설탕도 귀했다. 하지만 중국은 남쪽인 광둥, 푸젠, 사천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했고 1548년에 사신으로 갔던 최연이 조선에서는 귀한 약재인 설탕을 중국에서는 평민도 차에 타서 마시는 걸 보고 놀랐다는 기록이 남아있었다.

조선일보, 1940년 5월 26일

중국에서 수입한 밀가루와 설탕으로 만든 호떡은 순식간에 조선 사람들의 혀를 사로잡았다. 서울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선물로 호떡을 사들고 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는데, 날품팔이의 하루 품삯이 50~60 전이고 국밥이 15전, 20 전일 때 5전이었다고 하니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화교를 보는 조선인의 눈은 결코 곱지 않았는데, 임오군란 때 넘어와 불공정 조약을 바탕으로 장사를 해서 조선의 돈을 긁어가는 화교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짱개의 어원인 장꾸이(掌柜)는 돈통, 돈통을 관리하는 사람, 가게 주인을 뜻하는데, 가게 주인을 화교에 대한 비하어로 쓴다는 점에서 우리가 화교에 갖고 있는 악감정의 뿌리가 어디인지 알 수 있다.

게다가 일제강점기 일제는 일부러 중국인과 조선인의 사이를 이간질했다. 중국에서 활동하는 조선 독립운동가의 입지를 줄이고 일본에 대한 불만을 화교에게 돌리기 위해 일부러 조선인과 화교의 충돌을 일으켰고 조선에서 화교를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의 2등 국민으로 끼워 넣어 일종의 욕받이처럼 이용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호떡집에 불이 나면, 정말 강 건너 불구경이 되는 것이다. 안 그래도 기름을 많이 사용하는 호떡집은 실제로 화재가 많이 일어났고, 뛰어나온 중국인 주인이 중국어로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도와주는 대신 쌤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호떡도 일제가 패망을 치달으면서 밀가루가 부족하게 되면서 1940년을 전후로 사라지게 되었다. 물론 당시에 부족했던 것이 밀가루 만이 아니었지만. 호떡의 맥이 일본 패망과 함께 완전히 끊겼다가 미국의 원조 밀가루가 들어오면서 다시 부활하게 되었는데. 우리가 지금 흔히 먹는 호떡은 실은 화교 호떡집의 호떡과 다른 음식이다.

피코크 호떡

화교 호떡의 특징은 라드나 쇼트닝을 발라 겹겹이 층을 낸 것인데, 페스츄리를 생각하면 된다. 층을 내지 않은 것은 호떡이 아니라고 하는 화교도 있을 정도. 이마트가 대만에서 수입한 피코크 계피 호떡을 보면 원래 호떡이 어떤 맛이었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지금 우리가 먹는 호떡은 원조 밀가루가 들어오면서 가장 손쉽게 열 수 있는 가게가 호떡 노점이 되면서, 옛날 화교 호떡의 기억을 살려 만들기 시작한 일종의 유사품으로 최근의 씨앗 호떡 등의 발전을 생각하면 중국의 영향을 받은 독자적인 요리라는 점에서 일본의 라멘과 닮은 구석이 있다.


하지만 정말로 일본의 라멘과 닮은 한국의 요리라면 짜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음 편 '왜 중국집에서 단무지가 나올까요?'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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