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조선의 중국 요릿집.
화교가 다른 나라에서 자리를 잡기 위한 첫걸음으로 동업으로 같은 화교를 대상으로 하는 중국 음식점을 차린다. 처음에는 노점으로 시작해서 식당으로 확장하는 경우도 많다. 화교의 중국요리뿐만 아니라 외국에 진출한 대부분의 로컬 푸드가 처음에는 외국에 살고 있는 같은 나라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데, 요리에 대한 입맛은 어느 나라나 보수적이기 때문에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일하는 화교의 숫자가 적지 않았고, 그런 화교 대상으로 식당이나 노점의 숫자가 적지 않았는데, 막상 일본인들이 손님으로 찾는 경우가 드물었다. 우리나라에도 우리나라에서 일하는 캄보디아 사람이나 네팔 사람들을 위한 캄보디아 식당이나 네팔 식당의 숫자가 꽤 많지만 한국인 손님이 찾는 경우가 많지 않은 것하고 비슷한데, 밀가루 위주의 동물성 육수가 베이스인 중화요리는 당시만 해도 일본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중화요리가 전 세계 어디에서도 즐겨먹는 음식이지만 한국의 짜장면이나 미국의 좌종당계(General Tso's Chicken), 일본의 교자나 라멘 같이 현지화된 중화요리가 등장한 다음에야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도 라멘 이전인 옛날에도 라멘과 비슷한 면요리를 파는 화교 식당이나 노점이 상당히 많았지만,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지는 않다. 제대로 받아들여졌다면 난징 소바(南京そば)나 시나 소바(支那そば)같이 애매하면서 모멸적인 이름 대신 우육면이나 란주 라미엔 같은 제대로 된 중국요리 이름으로 불렀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짜장면이 중국에서 찾아보기 힘들지만 짜장면이라고 부르듯이.
비슷한 시기의 일본의 화교에 비하면 조선의 화교는 사정이 좋았다. 중국 본토와의 무역으로 일본의 화교보다 훨씬 주머니 사정이 좋았고, 그런 넉넉한 주머니 사정이 중국 요리 자체의 발전으로도 이어졌다. 호떡 노점으로 시작해서 중국집을 열고, 더 돈을 모아 호텔을 세우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중국어로 호텔을 반점이라고 부르는데 무협지의 한 장면처럼 반점이 식당과 숙식을 모두 제공했던 시절의 흔적이다. 지금도 베이징에 있는 고급 호텔의 이름이 북경반점인데, 한국 중국집 이름에 반점이 유난히 많은 것도 잘 나가던 시절의 흔적이다. 지금은 좀 메뉴 숫자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짜장면, 짬뽕, 볶음밥에 탕수육이면 충분할 동네 중국집에도 난자완스나 팔보채, 해삼주스나 샥스핀 같은 고급 요리를 메뉴판에 올려놓았던 것도 옛날에 중국집이 정말 잘 나갔던 시절의 흔적이다.
그렇게 1920년대에 정점을 찍었던 조선의 화교도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무역이라는 강점을 잃게 되었다. 일제가 조선의 일본인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화교 상인들의 무역에 제약을 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풀 꺾이게 된 조선의 화교들은 식당을 운영하면서 버티기 시작했는데, 일본의 화교들과 크게 다른 점은 조선의 화교들은 일본인을 대상으로 식당을 운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원래도 조선의 화교는 일본인 대상으로 장사를 많이 했다. 화교가 농사지은 채소도 구매력이 있는 일본인이 주 고객이었으니.
일제의 눈치가 보여 예전처럼 대규모로 장사를 못하게 된 조선의 화교는 일본인 손님을 대상으로 식당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화교를 일부러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의 완충제이자 욕받이로 쓰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의 화교는 무역의 비중이 줄어든 대신 조선의 일본인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형태로 화교 경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30년대 화교 식당의 숫자가 부쩍 늘어났다.
중국집에서 단무지를 주는 이유가 바로 일제 시대 일본인 손님을 받았던 흔적이다. 중국집이 일본인 손님을 많이 받았다는 흔적은 메뉴판에서도 등장한다.
90년대 초 영화루의 메뉴판 사진이다. 짜장면이나 짬뽕보다 우동이 더 먼저 쓰여있다. 요즘은 취급하는 곳이 많지 않은 중국집 우동이 최근까지 중국집에서 짜장면이나 짬뽕보다 더 대표적인 메뉴였던 흔적이다. 요즘은 취급하는 곳이 많지 않은데, 우동이라고 해도 가츠오부시 다시로 만든 일본식 우동이 아니라 여러 가지 야채가 풍성하게 들어있는 조선 화교의 고향인 산둥지방의 요리인 따루미엔(大滷麵)이다. 중국요리 치고는 강하지 않은 국물에 면이 좀 굵다는 것을 빼면 우동하고 닮은 구석이 전혀 없는 요리인데, 짜장면이나 짬뽕을 제치고 메뉴판의 제일 앞자리에 자리고 하고 있는 것은 따루미엔을 우동이라고 부르는 손님이 그렇게 많았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렇게 생각하면 의문의 메뉴인 덴뿌라도 설명이 된다. 소스를 뿌리지 않은 탕수육 같은 덴뿌라는 일본 요리인 덴뿌라와 닮은 구석은 거의 없다. 물론 튀긴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일본 이름으로 불릴 이유가 없는 메뉴다. 하지만 소스 안 뿌린 돈가스를 덴뿌라라고 부르는 손님이 많았다면 어떨까?
오무라이스도 그렇다. 중국식 달걀 요리인 푸융단(芙蓉蛋)을 밥 위에 얹어 먹는 푸융단펀(芙蓉蛋飯)이 있는데 굳이 오무라이스라는 일본어를 쓴 이유가 있을까?
지금은 보기 힘들어졌지만 한 때 중국집의 대표 메뉴였던 우동, 덴푸라, 오무라이스가 중국집을 찾는 일본 손님들이 자주 찾던 메뉴라고 생각한다면 반찬으로 주는 단무지와 함께 이해가 된다. 우동, 덴푸라, 오무라이스가 중국집에 파는 메뉴 중에서 맛이 강하지 않아서 중국 요리가 낯선 일본인 입맛에 잘 맞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일본의 화교 식당보다 조선의 화교 식당이 더 일본인에게 가까웠던 것이 아이러니 한데, 해방 이후에 한반도에 남은 화교 중에 중국어와 일본어는 해도 한국말은 못 하는 화교의 숫자가 적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라멘 이야기가 아니라 화교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 같은데, 라멘의 뿌리가 중국 요리다 보니 꼭 지적하고 넘어가야 하는 내용이었다. 물론 다음 편은 짜장면 이야기로 이어지는데, 짜장면 이야기는 또 얼마나 길어질지 상상도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