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새벽 5시 반은 아직 어둡다. 집 앞에서 서둘러 버스를 타고 다음 정류장에서 내렸다. 직장까지는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안경 위로 빗방울이 간격을 두고 툭툭 떨어진다. 우산을 펼치기에는 애매하다. 비를 피해서 아예 고개를 숙여 버렸다. 그리고는 안경알 너머로 길 건너 신호를 살폈다. 신호가 바뀌면 냅다 뛰어갈 자세였다. 어둑한 길 건너편에 아주머니 한분이 길 속에서 자꾸 무엇을 꺼내는 게 보였다. 신호가 바뀌고 비를 피해 서둘러 길을 건너간다. 총알처럼 튕겨서 횡단보도를 달렸지만 반도 못 가서 나는 멈춰 서고 말았다. 밤새 내린 비로 도로가 물에 잠기고 있었다. 어디에서 흘러 내려오는지 물은 자꾸 불어나고 있었다. 도로가 이미 물에 잠기고 있어서 온전히 횡단보도를 지나갈 수 없었다. 물을 피해 크게 돌아서 길을 건너야 했다. 그리고 그분이 하시는 일을 알게 되었다.
그분은 낙엽이 막아 버린 물길을 찾고 있었다. 물이 많이 차오르고 어두운 길은 어디가 배수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가버리기에는 도로에 물이 빠르게 차오르고 있었다. 순식간에 횡단보도가 건너편까지 잠기는 게 보였다. 나는 잠시 서 있다가 정장 옷소매를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길게 팔을 뻗어 낙엽과 뒤엉킨 흙탕물속을 헤집었다. 걷어 올린 옷소매 끝에 물이 닿았다. 소매 끝이 훅 젖어드는 게 느껴졌다. 팔을 뻗어도 바닥은 느껴지지 않았다. 물에 젖은 낙엽만 손등에 붙었다가 물 따라 저절로 떠나갔다. 갈아타야 할 버스가 금방 도착할 거 같아 마음이 바빴다. 손가락을 더 길게 뻗어 물속을 더듬거렸다. 손가락 끝으로 배수로 네모 칸이 느껴졌다.
예상처럼 낙엽이 겹겹이 쌓여있다. 손가락을 갈퀴처럼 구부리고 낙엽을 긁어냈다. 낙엽이 물 위로 붕 떠올랐다. 다행히 물은 내려가고 있었다. 계속 낙엽을 박박 긁어 올렸다. 뚫린 배수로 속으로 어찌나 빠르게 물이 흘러 들어가는지 물에게 고마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빠져나가는 물이 내 바쁜 출근시간을 배려한 듯하였다. 고개를 들어 보니 그분도 배수로를 찾은 듯 보였다. 낙엽을 자꾸 길 위로 끌어내고 있었다. 도로는 빠르게 자기 얼굴을 내놓고 있었다. 횡단보도의 선명하고 하얀 선이 야광 봉인 듯 드러나 보였다. 배수로의 모양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우린 저만큼 떨어진 채로 배수로의 마지막 낙엽을 긁어내면서 마주 보고 웃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마침 버스가 저 멀리 들어오고 있었다. 정류장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분도 나도 부리나케 자신들의 가방을 뒤졌다. 나는 얼른 내 가방 안쪽에 있던 노란 손수건을 꺼냈다. 그분께 드리면서
“괜찮으시면 이것으로 손 닦으세요.”
“괜찮으시면 이것으로 손 닦으세요.”
찌찌뽕!! 동시에 같은 말을 했다. 세상에, 그분은 나를 위해 손수건을 찾으셨던 모양이다. 우린 마주 보고 또 웃었다. 그 순간 버스는 우리 앞에 멈췄다. 서로 먼저 타라고 양보에 양보를 하면서 우린 둘 다 버스에 올랐다.
나는 한 정거장 뒤에 바로 내려야 했다. 내가 하차 벨을 눌렀다. 그리고 돌아보니 그분이 나를 보고 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정중하게 허리 숙여 서로 인사를 했다. “ 안녕히 가세요.” 또 같은 인사말을 동시에 했다. 찌찌뽕!!
이런 감정의 호사를 생전 처음 누려봤다. 무엇인지 행복했다. 무엇인지 뿌듯했다. 무엇인지 감사했다. 나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오늘따라 까다로운 미팅에도 신이 났다. 오늘따라 해결 안 되는 주제의 안건에도 희망에 찬 발언을 냅다 뱉었다. 뒷감당을 어찌할 것인지 걱정하는 동료들의 눈빛이 내겐 아무렇지도 않았다. 고장이 잦은 기계의 말썽에도 애정이 먼저 갔다. 나를 만나기만 하면 투덜대는 동료에게도 귀엽다는 생각이 듬뿍 들었다. 회사 주차장 끝에 피어 있던 빗속의 야생화도 참으로 어여뻤다.
나 혼자 라면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니 나에 대한 확신이 없다. 잠기는 횡단보도를 보고 망설이다 그냥 왔다면 하루종일 마음이 얼마나 불안하고 개운치 않았을까? 온종일 기분 좋은 나를 만들어 주신 그분이야말로 오늘 아침 출근길 여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