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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인트리 Nov 17. 2023

바람피우는 집중력

지금 무엇을 하는고?

 직장 캘린더의 내 일정에 MES 미팅이 잡혀 있다. MES 가 뭐냐? 이건 또 무슨 미팅이란 말인가?

얼마 전 미팅에서 현장에서 개선되어야 하는 몇 가지 제안 중에 나는 작업지시서를 지적했다. 현장에서 요구하는 것이면 즉시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젊은 대표님은 바로 MES전문가를 초빙했다. 그리고 곧바로 작업지시서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마련된 자리가 MES미팅이었다. MES(Manufacturing Execution System 생산관리시스템)은 기업의 생산 현장에서 작업 일정, 작업지시, 품질 관리, 작업 실적 집계 등 제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관리시스템이라고 한다. 나는 일정을 보자마자 골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나는 현장 적용 능력자로 선정되어 미팅에 참가해야 했다. “젊은 사람도 많은데 하필 왜 나란 말여.”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젊은 동료들 속에서 기죽지 않으려고 속으로는 죽어라 미팅 준비할 계획을 세웠다. 원료 입고부터 사용 후 재고까지 한방에 해결되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작업지시서를 쉽게 볼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키오스크 주문처럼  현장에서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모든 동료들이 능숙하게 활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컴퓨터만 봐도 무서워하는 동료들이다.  나이  50이 넘은 동료들이 쉽게 익힐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 봤다. 나도 디지털 지식이 많지 않으니 틈 날 때마다 고민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검색을 했다. 다른 제조 회사는 어떻게 하나?

 

검색을 자꾸 하다 보니 지난주 내내 잠을 못 잤다. 잠을 못 잔 이유를 설명하자니 부끄럽다.  일단 나는 컴퓨터가 느리다. 십여 년 전에 직장인 엑셀 과정을 2회나 들었으면서 무엇을 배웠는지 모르겠다. 하긴 요즘 며칠 전 대화도 기억이 안 나는데 십여 년 전에 배운 엑셀이 어떻게 기억이 날까마는 배울 때는 모두 다 알 것 같았다. 심지어 수업 시간에는 아주 잘한다고 칭찬도 많이 들었다. 그런데 배운 것들을 사용하지 않으니 실력 없는 수료증하나만 덜렁 남아있다. 장롱 면허처럼 깡그리 다 잊어 먹었고 이제 사용해 보려니 익숙하지 않아 두렵다.  

 

쉽게 배웠던 단축키뿐 아니라 함수는 더더욱 다 잊어 먹어서 검색창을 두드려 본다. 그런데 찾아보려는 주제의 검색창을 두드릴 때마다 내 취향을 귀신같이 아는 알고리즘이 나를 유혹한다. 나는 참 쉬운 사람이라서 물어다 주는 새로운 소식에 쉽게도 빠져버린다. MES 미팅에 필요한 자료들을 찾고 배워야 하는 본질을 잊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검색창을 넘나들었다. 내가 두드리는 검색창엔 왜 그리 재미난 소식만 있을까? 요즘 미니멀 라이프에 빠진 나를 알아챈 모든 디지털이 나를 유혹했다. 유혹에 홀려 밤 도깨비처럼 이창 저창을 넘나들다 보면 한두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린다. 결국  잠을 자야 할 시간을 놓쳐 버리곤 했다.

 

미팅 날이 오늘이라 어젯밤엔 딸들만 귀찮게 했다.

“큰딸아, 엄마 이거 여기다 작성해서 한 방에 검토하는 법을 좀  알려줘. ” 늦은 밤 잠을 자려고 준비하는 큰딸에게 부탁했다.

“막둥아, 이거 검색하는데 안 나와 , 어디서 찾아? 그냥 딸이  찾아줘.”기숙사에 있는 막둥이한테도 도움을 청했다.

둘째한테는 혼날까 봐 입도 뻥긋 안 했다.

"엄마, 그걸 지금 왜 하고 있어요? 새벽 4시에 일어나시면서~얼른 자야지. 엄마 아프면 누가 마음 아파? 자식들만 마음 아프지." 항상 엄마 걱정을 하는 둘째는  늦은 시간까지 잠 못 자는 나를 이렇게 혼을 낼게 너무나 뻔했다.

 

세상에는 왜 이리도 배울게 많은지 모르겠다. 나이 60이 되었으면 무엇인가 전문가가 되어 있을 줄 알았다.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주고 도움이 되는 나이 일 줄 알았는데 나는 아직도 배운다. 빠르게 변화하는 이 시대가 나를 가만 두지 않는다. 직장에서 매일 새롭게 만나지는 상황과 변화에서 배우고 집에서는 젊은 딸들에게서 배운다. 하다못해 편안하게 널브러져 있는 반려견 상구의 표정에서도 배운다.

“엄마, 너무 안달하지 말어요~”

 

암튼 이래저래 MES미팅은 오늘 마쳤다. 2주 동안 걱정했던 것에 비해 수월했다. 미팅 내용이 전문적이라서  못 알아들을까 봐 용어를 찾아보면서 준비했는데 걱정할 만큼은 아니었다. 전문가의 조언을 들으니 방향이 확실해지고 곧 사용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질 것 같아 기대가 생겼다. 덕분에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는 나도 성장하는 듯 뿌듯해졌다. 그나저나 다 잊어먹은 엑셀은 다시 배워야 할 것 같다. 딸들을 계속 귀찮게 할 것 같으니.


항상 응원하는 동료의 선물과 발사믹보코치니 샐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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