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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인트리 Jan 23. 2024

그녀에게 스며들다.

좋은사람 알아가기

  

회사 주차장 한쪽에 가을에 떨어진 은행 알갱이들이 굴러다닌다. 말랑거리고 냄새나던 껍질은 땅속으로 스며들고 단단한 알맹이만 남아서 겨울바람 따라 구석으로 몰려다니고 있다. 갑자기 눈앞에 굴러다니는 은행에 대한 호기심이 온몸으로 퍼져 간다. 냄새나던 은행 껍질은 얼마나 사그라들었는지, 은행 알갱이가 아직도 온전하게 단단한지 만져보고 싶다. 롱 패딩 호주머니 속에 있던 손가락이 꼼지락 거린다. 은행을 향해서 살얼음이 끼어 있는 주차장을 슬금슬금 걸어간다. 아직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텅 빈 주차장이다. 몇 걸음을 떼는 순간 내 걸음을 막아서며 차량 한 대가 들어온다. 아직 출근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각이다. 은행을 향해 가던 걸음을 멈추고 차문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차 안에서 역시나 그녀가 내린다. 항상 출근이 빠른 그녀다.  

   

나는 그녀와 시선을 맞춘다. 그리고는 홀린 듯 내가 하려던 행동을 잊어먹고 그녀를 따라 회사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사십 대 후반의 그녀는 언제나 말끔한 정장 차림이다. 겉모습으로는 CEO인 듯 간부인 듯 회사를 향하는 발걸음에 당찬 분위기가 있다. 그런 그녀를 보는 나의 눈에는 정겨움이 가득하다.     

 

처음에 그녀를 보았을 때 생산직 직장에서 얼마나 버틸지 걱정이 되었다. 표정 변화가 없는 얼굴에는 차도녀 같은 지적인 냉랭함이 있었다. 아무에게도 곁을 내어 줄 것 같지 않았다. 수더분한 우리 동료들과 잘 어울려 줄지  걱정되는 인상이었다. 며칠을 지켜보니  예상했던 대로 대화에 쉽게 섞이지도 않았고, 웃음이 퍼지는 분위기에도 잘 웃지도 않았다. 신입 직원이 들어오면 통과의례적인 호구조사(어디 사냐? 가족은 몇이냐? 등등)가 있기 마련인데 많은 질문에도 가벼운 웃음으로만 대신했다. 게다가 체구는 너무 마르고 가녀린 사람이었다. 여덟 시간 이상 서서 일하는 우리 회사의 작업을 해 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녀가 입사한 지 한 달쯤 시간을 보내고 그녀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우려와는 달리 그녀는 힘으로 대응해야 하는 일을 누구보다 잘해 냈다. 뿐만 아니라 식품회사의 HACCP 규정에 맞는 조금 까다로운 일지도 곧잘 배웠고 실수도 적었다. 점차 납기 시간 안에 맞춰서 생산해야 하는 현장운영의 흐름도 제대로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일머리가 좋아서 일의 습득 능력이 남다르게 빨랐다. 거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진지함과 예의 바름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항상 1시간쯤 일찍 출근해서 휴게실의 안마기로 몸을 챙기는등, 자신을 가꾸는 일에도 결코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어느새 동료들에게는 든든한 후배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녀는 예기치 않는 연장근무나 쏟아지는 작업량에도 부드러운 표정이 변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의 투정과 짜증에도 이해할 만한 이유를 찾아내서 변호해주는 슬기로운 재주도 가졌다. 특히나 마감시간에 쫓기게 되면 시골 농번기하고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생산현장은 모두가 바빠진다. 서로 각자 맡은 일에 집중하느라 옆에 서있는 사람의 마음과 고충을 헤아리기는 너무나 어렵다. 그렇게 긴박한 상황에서도 그녀는 의연하게 자신의 할 일을 하면서도 옆 사람을 은근슬쩍 도와준다. 흐름을 따라 가느라 곤경에 처한 동료가 있으면 소리 없이 해결하기도 하고, 동료 곁에 위험한 물건이 도사리고 있으면 아무도 몰래 슬쩍 안전하게 치워주고 간다. 작성해야 하는 일지를 슬쩍 건너다보고 잘못된 게 있으면 슬며시 고쳐 놓기도 한다. 내색을 하지 않는 행동들이라서 도움 받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내용이고 상황이다. 섬세하지만 특별히 튀지 않는 행동들이다. 이런 보이지 않는 행동들이 동료들에게는 더더욱 감동을 주고 있었다.  

   

생산직 조직이란 곳은 내일이면 나와 아무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는 곳이다. 커리어가 쌓이는 직장이 아니라서 퇴사하면 그만이다라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이 조직에서 영원할 것처럼 그녀는 소신 있게 모든 일과 사람에게 진심을 다 한다. 관계의 분란 속에 넣어도 조화로운 분위기를 만들고, 누구나 어려워하는 일을 맡겨도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들어 낸다. 입사 일 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특별하지 않아도 조직에서 아주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은행나무 열매 같다. 단단한 껍질을 깨야만 속을 내어주는 은행, 만병 통치약처럼 온갖 효능을 가진 은행 열매가 그녀와 닮았다. 그녀는 누구 곁에 있어도 도움이 되는 영양제 같은 사람이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5월의 초록색 은행 이파리처럼 항상 생기가 넘치고 가을의 노란 은행잎처럼 눈빛 속에는 낭만이 숨어 있다. 단단한 껍질처럼 항상 자신을 가꾸어 놓고  은행알을 넣은 영양식처럼 곁에 있으면 든든함을 주는 사람이다.

    

회사 주차장을 빙 둘러 있는 은행나무는 내년에도 주렁주렁 열매를 내놓을 게 분명하다. 나는 그녀를 보면서 은행이 열리고 익는 여러 해를 같이 보내고 싶은 소망이 있다. 직장 동료이면서 좋은 사람을 곁에 두고 싶은 욕심이다. 그나저나 오늘 퇴근길에는 굴러다니는 은행의 무리들을 만져 봐야겠다. 겨울의 맨땅에서 이리저리 쓸려 다녔는데, 아직도 알갱이가 굳건하게 들어 있는지~~ 그 알갱이는 온전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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