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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님. 제발요."(반장일지 17)

까짓 거 내가 해치운다.

by 파인트리

팀장님이 혼자 페인트 칠을 하고 계신답니다. 모두가 퇴근한 현장에서 혼자 페인트 칠을 하고 계신다는 연락이예요. 연차를 내고 쉬는 중인데, 쉬는 날 진짜 편히 뒹굴 거리고 싶은데 페인트칠하는 팀장님 덕분에 마음이 불편합니다. 마음은 회사에 나가 보고 싶지만 오늘은 나갈 수가 없어요. 우리 집 VIP 반려견 상구 때문이지요. 우리상구가 요즘 분리불안을 겪는 중이라 하울링을 해요. 오늘도 집을 비우지 않고 하울링 교육을 시키려고 연차를 낸 거였지요. 더구나 아래층엔 예민 보스가 살아요. 행여 민폐를 끼칠까봐 온 식구들이 집을 비우지 않으려고 교대로 휴무를 하고 귀가 시간을 맞추고 있거든요. 휴무인 사람은 상구의 분리불안 교육까지 책임져야 해서 사실상 휴무가 그리 편하지는 않아요. 엄마가 휴무인 것을 아는 딸들은 오늘 늦게 귀가할 예정이었어요. 할 수 없이 딸들에게 아쉬운 문자를 보냈습니다.


"오늘 조금만 일찍 와줘."

"엄마 오늘 쉬는 날이잖아. 왜요?" 역시 딸내미들 반응이 시원찮아요.

"응, 팀장님이 혼자 페인트 칠을 하고 계셔서 엄마가 회사 좀 가 봐야 해.!!" 잠시 톡이 잠잠하더니 폭탄이 이어집니다.

"아니 밤중에?"

"그것도 쉬는 날?"

"도대체 회사는 엄마한테 어떤 존재야?"

"엄마 쓰러져도 회사는 책임을 안 져요. 우리가 엄마를 책임져야 해. "

성질머리 고약한 둘째는 더욱 단호합니다.

"안돼! 가지 마!!" 딸들의 폭격에도 마음이 갈팡질팡 어수선합니다.


휴무고 뭐고 상관없이 온통 마음이 회사에 가 있습니다. 왜 나는 쉬는 날에도 회사에 가야 한다는 책임감, 의무감이 뒤섞인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걸까? 우리 팀장님은 혼자 일을 하시겠다고 해서 왜 이리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하시는 걸까? 다 같이 내일 오후에 하면 될 일인 것을..... 팀장님께서는 페인트 냄새가 역하다고 걱정하면서 혼자 하시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 결정을 하고도 남을 분입니다. 힘들고 위험하고 어려운일은 항상 앞장서서 혼자 다 해치우시려 하거든요. 회사를 사랑하고 아래 직원을 아끼는 마음은 너무나 이해 합니다. 경비를 절약하고 다른 팀에게 업무 협조를 요청해야 하는 불편함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팀장님. 이건 아니잖아요. 마음 불편한 우리들은 어쩌라고요. 팀장님께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우리 맘은 어쩌라고요. " 내 마음의 소리가 저절로 밖으로 나옵니다.


생산현장은 전쟁터가 맞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거 확인 좀 해주세요!"를 외쳐야 합니다.

그런데 협조를 구하려고 하면?!

품질팀은 "아닙니다. 원인은 분석해야 하고, 대책도 세워야 하고, 절대 품질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우리 생산팀의 속마음은 "납기시간 놓치면 어쩔 건데, 품질이 책임질 거야?"

공무팀과의 협조에는

"이건 설비라서 빨리 안 되고요~"

"이건 시설물이라서 점검과 계획이 있어야 해서 빨리 안 되고요~"

"이건 기계라서 안 되고요~" 매번 빠르게 안 되는 이유가 훨씬 많습니다.


어려워요. 쉽게 해결되는 게 없지요. 각자 자기 팀들의 지식과 관점과 기준이 있으니까요. 절차도 지켜야 하고 매뉴얼도 따라야 하고, 그런 내용을 모두 이해는 하는데도 생산은 일단 덤벼듭니다. 납기를 맞춰야 하니까요.

"아니… 그냥 납기 잘 맞추게 불같이 달려들어 협조 해 주면 안 됩니까?!" 다른 팀의 반응이야 어찌 되었든 일의 진행을 앞세울 수밖에 없는게 생산입니다. 그래서 생산은 항상 조급합니다. 까짓 거 기다리면 되는데, 다른 팀과 협조하고 쉽게 쉽게, 좋게 좋게 결론을 얻어내면 되는데 책임감이 조급하게 합니다. 책임감이 발을 동동 구르게 합니다. 동료들이 애가 타서 발을 구르는 것을 보면 나는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합니다.

"와! 우리 생산팀 모두들 동동 구루무 영업 시작 했다.!!"

(동동:북을 울리는 소리. 구루무: 크림의 일본어)


이번 페인트 사건만 해도 그렇습니다. 팀장님은 다른 팀에 협조 서류를 제출해야 하고 설명해야 했습니다. 공무팀은 외부 업체와 조율을 해야 한다고 했지요. 하지만 점검이 다음 주로 코 앞에 와 있기는 했어요. 초도생산과 대량 물량이 잡혀 있어서 생산은 다음 주 일정이 바쁠 계획이었지요. 페인트는 세척실 전체 천장을 칠해야 할 정도로 공사가 제법 컸어요. 작업중에는 몰려드는 식기들을 보관할 곳이 없고요. 페인트 칠을 해야 할 세척실 현장을 비울 수 있는 시간이 이번 주가 아니고서는 사실상 없기는 했지요. 그러니 한가한 날에 빠르게 페인트 칠을 마무리해야만 한다는 결론이었어요.


팀장님은 이 사실에 마음이 급하셨습니다. 공무팀에서 빠른 일정으로 페인트 칠을 해 준다고 했으면 좋으련만, 공무팀의 일정대로 움직이려 하다 보니 점검 일자를 맞추기 어렵다고 하신 것 같아요. 결국 팀장님이 혼자 하시겠다고 결정을 해 버린것이지요.


희생의 끝에는 보상이 있을까요? 물론 팀장님은 보상따위는 바라지도 않으시고 진심으로 회사를 위한 마음과 책임갑에서 나온 행동임을 누구보다 나는 잘 알고 있지요. 모든 희생은 혼자 다 하시려고 하면서, 여러 가지 고민을 혼자 해결해 주시고, 우리가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가이드 마련도 혼자 다 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 게 안타까워요. 옆에서 도와드리고 싶은데 모든 고민과 일을 할수 있는한 혼자 다 해결 하려고 하십니다.


가끔 고민하게 됩니다. 좋은 회사란 개인이 희생해야 하는 곳일까, 아니면 조직이 협조를 잘해야 하는 곳일까? 누군가 헌신하면 당장은 업무가 잘 돌아갈 지 모르지요. 하지만 희생하는 사람은 금방 지쳐요. 보상도 없이 일만 가중되고, 책임감과 애사심만으로 버티다 결국 번아웃이 찾아오지요. 지금도 저렇듯 묵묵히 희생하는 팀장님이 너무 걱정이 됩니다.


묘하게도 개인의 희생은 동료들의 미안함과 시기심만 불러오게 돼요. 조직이 협력하는 체계를 만들지 못하면, 이번에는 ‘페인트칠’이지만 다음번엔 무엇이 될지 모릅니다. 그러니,

"팀장님. 제발요. 혼자 다 하지 마세요."


닭가슴살샐러드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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