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쇠소녀단 2 몰아보기. 그리고 다시 루틴

휴무의 일탈

by 파인트리

휴무입니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보니 반나절이 훌렁 가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생각에 후다닥 오늘의 일정을 세워 봅니다. 그다지 중요하게 할 일은 없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 각자 먹고 싶은 것을 해 먹고 심지어 반려견 강아지도 산책 한 번만 시켜주면 혼자서 잘 놉니다. 가족 걱정은 이제는 할 필요가 없고, 나 홀로 잘 보내면 되는데 왠지 오늘은 책도 읽기 싫고, 운동도 가기 싫고 무엇인가 먹기도 싫고 뭐 그런 날입니다. 이런 날은 방구석에 앉아서 무엇을 해 볼까 궁리를 합니다.


휴무에는 반드시 책을 읽고, 글 한 편을 쓰고, 운동을 두 시간 하고, 구몬영어를 해야 하는 나만의 루틴이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온몸이 으스스 컨디션이 안 좋은 듯하고, 늦잠을 너무 자버린 날은 루틴을 지키고 싶지 않습니다. TV 리모컨을 들었다 놨다 하다가 마음을 굳힙니다. 얼마 전부터 채널을 돌리다가 만난 예능을 몰아 보기로 한 것이지요.

몰아보기를 할 프로그램은 무쇠소녀단 2, 여자 연예인 4명의 복싱도전기입니다. 원래가 복싱이라는 경기를 경기로 보지 않았고 사람을 왜 때리지?라고 의심하면서 바라보던 나였기에 복싱 도전기라는 도전도 낯설게 느껴졌어요. 그런데 어느 날 채널을 돌리다가 무심히 한 편을 보게 되었지요. 각 분야 여성 격투기의 프로들과 아직은 훈련이 덜 된 무쇠소녀단들이 경기를 하고 훈련을 하는 모습이었어요. 그런데 정말 상대도 안되게 형편없는 실력으로도 그녀들은 최선을 다하고 피 같은 땀을 흘리면서 훈련을 하더구만요. 그녀들에게 감동을 하기 시작했지요. 강인한 체력을 필요로 하는 많은 프로그램을 보았지만 사실 체력 좋아서 좋겠다고 부러워만 했지, 감동은 없었거든요. 리모컨을 꽉 붙잡고 몰아보기를 시작했습니다. 연습 스파링에서 그녀들이 맞으면 안타까웠고, 캠프에서 즐거워하는 모습은 동지애를 느끼게 하는 단단함이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반복해서 연습하면 자신감을 얻게 되고 동료가 있으면 힘이 난다는 삶의 진리를 또 한 번 느껴보게 되었지요.


사실 격투기를 바라보는 내 마음에는 두려움이 있어요. 고등학교 때 태권도 시합을 나간 적이 있거든요. 그때 나는 시합이라는 것을 그냥 재미로 생각했던 모양이에요. 시합이라고 준비를 할 때는 아무 생각이 없다가 경기장에 들어가니까 갑자기 두려움이 확 밀려와서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어요. 숨을 쉴 수가 없었지요. 첫 번째 경기에서 상대는 나보다 키가 훨씬 작았고 얼결에 내지른 내 옆차기에 상대 선수가 풀썩 주저앉았어요. 그런데 그때 내 맘이 이겼다기보다는 상대를 때렸다는 생각이 훨씬 많았어요. 죄책감이 컸지요. 너무 미안했어요. 나도 모르게 상대선수에게 쫓아가서 미안해를 연발했지요. 깨끗이 다음 경기를 포기했어요. 코치님은 다 이겼는데 왜 포기하냐고 꾸중하셨지만 제가 하도 울고 있으니까 그냥 저를 달래주셨어요. "그래 너는 운동하면서 살 것은 아니니까"토닥토닥. 열 일곱 소녀일 때 내 마음은 참 여리고 심약했어요. 무엇이든 죽기 살기로 해야 한다는 집념이 없었지요. 그리고 철딱서니도 없고 진지하게 삶을 바라보는 태도도 없었어요.


이번 무쇠 소녀단 2 복싱 도전기를 보면서 끝없는 연습은 자신감을 주고 몸에 베인 기술은 실력이 되고 태도가 된다는 사실도 알았어요. 무엇보다 김지훈 코치님과 김동현 단장님이 자신감을 키워주는 모습, 두려움을 이기게 해주는 훈련 과정들이 경기에 이겼을 때보다 더 큰 울림을 주었어요. 무쇠소녀단의 유이님이 경기를 앞두고 스트레스로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두려움을 극복해 내고, 설인아 님은 발목 부상을 의지로 극복하는 모습들, 박주현, 금새록 님도 경기의 두려움을 떨쳐내고 의연하고 강인한 눈빛을 장착하고 마지막 경기에 임하는 모습들은 자신감과 실력이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보여주는 단 적인 하나의 예가 될 법합니다.


마지막 편에서 고된 훈련을 견디고 후회 없는 마지막 경기를 즐기는 모습들은 정말 장했습니다. 두려움을 이겨낸 정신 승리가 무엇보다 멋졌어요. 끝까지 몰아보기를 하고 나니 무쇠소녀 네 분의 앞날을 끝없이 응원할 것 같아요. 팬심이 아니라 삶을 살아내는 힘을 같이 기르는 동료 같고 동지 같아요.


휴일 내내 티브이 앞에 앉아서 몰아보기 일탈을 하다가 갑자기 교훈을 하나 얻은 사람처럼 길거리로 나갔어요. 추적거리면서 내리는 비도 제법 낭만과 운치가 있더라고요. 으스스하던 몸은 오히려 걷기에는 덥지 않아서 좋았고요. 온몸에 힘이 불끈 나고 무엇이든 열심히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이 걸음걸음마다 다시 생겨났어요. 걸으면서 생각하니 어쨌든 무엇인가를 얻으려면 끝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진리를 다시금 깨달은 것 같아요.


갑자기 휴무에 지켜야 할 루틴을 지키고 싶어 지네요. 일단 지키고 보자고요. 나중에 어떻게 되든지 그건 알 바 아니고요. 지금을 잘 살아내는 법이라고 여겨져요. 집으로 돌아가 책상에 앉아야겠어요. 저기 빗속에 보이는 제과점으로 가서 좋아하는 단팥빵이랑 커피 한잔 사들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머릿속이 바빠지네요. 다음 주 회사에서의 일정도 잡아야 하고 줌수업에서 발표해야 할 책 내용도 정리를 해야 하고 구몬학습지 선생님의 문자도 확인을 해야겠어요. 틀렸다고 빨간 줄이 몇 개나 그어져 있을는지요. 지난주 배운 운동 연습도 해야 하고 이번 주 반려견 상구 돌봄 달력도 정리해야겠어요. 음~~ 그러고 보니 휴무의 일탈이 용기로 돌아오는 마법을 부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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