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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인트리 Nov 27. 2021

찢어진 청바지를 입을 용기

멋과 나 사이

  

평균 3주에 한 번은 미용실에 가서 이발 수준 머리를 자른다. 항상 짧은 머리다. 관리를 잘하지 못하니 짧은 머리가 낫다. 내게 잘 어울리는지 별 관심은 없다. 거울 속의 내가 깔끔해 보이니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런데 지난달 퇴근이 계속 늦어지고 피로가 쌓이다 보니 미용실 갈 시기를 놓쳤다. 5주가 되어가니 머리가 수북이 자라고 있었다. 이번 주엔 무조건 미용실이다.    

 

내가 머리를 하고 있는 동안에 어르신 한분과 젊은 분이 들어온다. 두 분은 두런두런 얘기를 하신다.  어머니와 딸 같다. 어른께서 따님에게

 “왜 추운데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왔어? 그만 버리고 다른 거 입지~” 40대쯤 되어 보이는 딸이 웃으면서

 “엄마 이거 비싼 바지라서 함부로 버리고 그러면 안돼요.” 한다.

“누가 그런 찢어진 걸 돈을 주고 사누?”

 “엄마, 요즘 유행이야.” 두 분의 대화를 듣던 미용실 사장님도 거든다.

 “저도 찢어진 청바지를 사다 놓고 퇴근을 해서 보니 할머니께서  재봉틀로 모두 박아 놓았던 적이 있어요. 우리 손녀가 미용실에서 청바지가 찢어지도록 일을 한다고 안쓰러워하시면서요.”   

  

 

찢어진 청바지, 나는 그걸 입어보지 못했다. 입을 용기가 없는지도 모른다. 내 옷장의 절반 이상이 진으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찢어진 청바지는 아직 내게 낯설다. 왠지 쳐다볼 것 같은 시선이 부담스럽다. 남에게는 관심이 없는 세상인 줄 알면서도 내가 입는 옷에는 나도 모르게 신경을 쓴다. 내 옷의 색깔들이 거의 검정과 브라운이다. 어디에 있어도 눈에 띄지 않는 색이다. 무난한 옷 색깔 속에 나를 숨겨두고 사람들 속에서 편안해한다.     



유행을 느끼는 것 에는 무딘 편이어도 옷 잘 입고 멋스러운 사람들을 좋아한다. 찢어진 청바지를 잘 소화하는 친구들에게는 멋있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눈에 띄게 멋을 내는 친구들의 용기에도 항상 찬사를 보낸다. 얼마나 부지런해야 멋을 내는 것이 가능한지를 잘 알고 있다. 일단 나는 게으르다. 열심히 꾸민다고 해도  보이는 모습에 별 자신감도 없다. 기껏 치장을 하고 나가면 그날의 모든 행동은 너무나 불편하다. 잘 차려입은 날은 행동도 잘해야 하는 부담이 동시에 온다. 그만큼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다. 젊었을 때는 그런 부담을 적당히 즐기기도 했다. 나이를 먹다 보니 점점 불편이 싫어진다. 예의 수준의 복장이면 될 것이라는 생각도 있다.  


    

그런데 세상은 나를 보여주기를 원한다. 겉으로든 속으로든 보여야 가치가 인정되는 세상이다. 내면의 양식을 아무리 채웠어도 첫인상이 엉망이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다시는 만날 수 없다면 첫인상에 대한 변명을 해 볼 기회도 없을 테니 보이는  것도 중요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건 나에게는 잘 보이려는 용기가 없다.  남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노력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노력은 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는 있다. 알고는 있어도 실천하기까지는 골백번도 더 생각하고 생각해야 한다. 내가 찢어진 청바지를 입을 용기가 생겨났을 즈음에는 시중에는 그런 바지가 사라지고 없을는지 모른다. 살아오는 동안 고민이 너무 길어서 시기를 놓쳐버린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대화에 집중하다 보니 내 머리는 너무나 짧아져 있다. 이미 늦었다. 한 달이면 또 자라 있을 머리이니 스타일이 바뀌었다고 너무 애석해하지도 않는다. 괜히 미용실 사장님만 미안해하신다. 이번 달의 나는 유난히 짧은 머리로 세상에 보이게 된다. 어쩌랴 나 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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