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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인트리 Dec 02. 2021

기계를 좋아하는 여자

고장 났어? 어디 내가 한번.

   

현장에 샐러드 자동 포장 기계가 들어왔다. 원래 수동으로 압축을 하는 진공 포장기였다가 이번에 로터리 수축 포장기계를 도입하게 된 것이다. 전 직장에서부터 자동 포장기계를 익숙하게 보아왔던 나는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길이가 6~7m에 이르고 높이가 2.5~3m나 되던 기계들보다 작아서 조금은 실망을 했다. 하지만 그동안 보았던 기계의 반 정도밖에 안 되는 크기임에도 훨씬 편리한 기능들을 내장하고 있었다. 유통기한을 날인하던 인쇄 기능도 활자 동판을 갈아 끼우던 불편을 없애고 터치 방식이다. 중요한 기능에는 센서가 작동을 했다. 수축필름을 바꿔야 할 때 자동으로 멈추는 기능이 있고, 날인할 때 사용하는 먹지가 끊어지지 않나 조바심을 내면서 지켜볼 필요가 없어졌다. 먹지를 교환할 때가 되면 알람이 울렸다. 기계라는 게 작동 내용만 조금 다를 뿐이지 익숙해지고 나면 큰 어려움은 없는 것 들이다.    

  

그럼에도 작업자들 사이에는 기계에 대한 공포가 있는 사람들도 많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서 신체를 다치는 사고를 목격하게 되면 기계 앞에 서는 게 두려울 수 있다. 사고를 목격한 사람들은 기계와 관련된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심지어 단순한 청소를 맡겨도 고장을 내는 건 아닌지 걱정을 하면서 피하려고 한다. 전원 버튼만 켜 놓아 달라고 부탁을 해도 맞는지 틀리는지 여러 번 확인을 하곤 한다. 기계와 익숙하지 않게 살아온 사람들이라서 그 두려움이 더 클 수 있다.


     

그런데 나는 기계가 재밌다. 기계는 사랑하면 마음을 조금씩 내어주는 낯선 연인 같다. 전원을 켜서 기계에 불이 들어오면 살아있는 생물체 같다. `자 일을 시작해 볼까` 하고 작동을 시키면 교과서대로 움직이는 모범생 같다. 시간당 원하는 만큼 생산을 해결해 준다. 기분 좋게 하루를 마치면 기계가 사랑스러워서 정성껏 점검을 해 주게 된다. 회사의 재산인 기계가 내 것인 양 자꾸 들여다보고 공부하게 된다.    

  

이런 기계가 심통을 부리는 날에는 정말 힘들다. 설명서는 왼 통 어려운 외국어뿐이고, 어디가 잘못된 것인지 찾아내느라 진땀을 흘리게 된다. 말을 못 하는 어린아이가 울기만 하는 것처럼 고집을 피우고 작동을 하질 않는다.  기계적인 결함이 있을 때도 있지만, 원칙대로 하지 않았을 때 기계는 쉽게 삐진다. 나사가 풀어지기 시작할 때 이미 신호를 보낸다. 그걸 모르고 지나치면 꼭 심통을 부리게 된다. 규정을 어기고 작업을 하게 되면 그게 아니라고 까탈을 부린다. 모른척하고 계속 부려먹으면 결국 멈춰 버린다. 움직여 달라고 애원을 해도 소용이 없다. 잘못된 부분을 찾아내게 되면 그나마 다행이다. 해결을 못해서 결국 업체를 불러 서비스를 받게 될 때마다 느끼는 건 작은 실수로 작동을 멈추게 했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 잘 켜지고 잘 돌아가던 라디오와 벽시계를 나는 가끔 해부했던 적이 있다. 열심히 부셔놓기는 했는데 짝을 맞춰 놓지를 못해서 안절부절못했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나란 나란히 부속을 챙겨서 늘어놓고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콩 꿀밤 한 대를 나에게 먹이고는  능숙하게 다시 조립을 해 주셨다. 그 옆에서 나는 무릎을 끌고 이동하면서 혹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열심히 지켜봤다. 재밌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약간 아버지를 닮았다. 아버지는 무엇이든 못 고치는 게 없다. 라디오. TV. 그 옛날 전축까지 온 동네 가전을 고치러 다녔다. 온 동네 전기제품을 고치면서 아버지는 인기쟁이가 되었고, 온갖 집안일을 떠맡은 어머니는 고약한 마누라가 되었다. 어찌 되었건 아버지의 피를 닮아서인지 나는 결혼 후에도 전등 갈고 전기 스위치 정도는  뚝딱 갈아 치웠다. 고장이 난 게 있으면 이리저리 상식 없이 맞춰 보아도 우연히 고쳐지는 게 많았다. 이런 뜻밖의 재능이 직장에서는 기계에게 애정을 갖게 했다.  

   

덕분에 현장에서 기계에 대해서 뭘 좀 아는 사람이 되었다. 멈춰버린 기계의 문제점을 찾아내어 해결하게 됐을 때의 뿌듯함은 보통의 즐거움과는 다르다. 겉으로는 별것 아니다는 표정을 짓지만 속으로는 환호를 지른다. 기계는 볼트를 조이거나 풀어서 원하는 형태로 몸을 만들어 주면 마음이 잘 맞는 동료이기도 하다. 어느새 나는 출근하면 전원을 켜 놓으면서 “밤새 별일 없었니?” 안부 인사를 하기도 한다. 왼 종일 시간을 같이 보내는 날도 있다. 내게 맡겨진 일도 아니건만 나도 모르게 틈만 나면 하루 종일 기계 주변을 맴돈다.  

   

멋도 모르고 유행에도 관심은 없지만 나는 기계를 좋아하는 여자다. 그 동료 같은 기계가 있는 직장도 좋다. 직장의 구석구석 사랑하고 챙겨보게 되는 것들이 많기는 하다. 그중에서도 당분간 나의 사랑은 로터리 포장기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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