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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ut to Frame Mar 14. 2016

[Cine] 미자씨의 시를 쓰는 마음

영화 [시]  (Poetry,2010)


  신형철 평론가의 말이다. "한국 영화에는 '부조리'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는 감독 두 명이 있다. 한 명은 고통을 수반한 부조리 앞에서 웃는 악마가 되고, 다른 한 명은 우는 천사가 되어 나타난다." 여기에서 웃는 악마는 박찬욱 감독, 우는 천사는 이창동 감독을 가리킨다. '부조리'는 우리를 둘러싼 시스템이 갖고 있는 균열이다. 그리고 그 균열을 마주하는 것은 큰 고통을 수반한다.  앞의 말처럼 이창동 감독은 관객들을 적나라하게 노출된 부조리 앞에 세워놓은 채, '눈물의 향연'을 여는 감독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보는 시간은 내내 불편하다.  인물 멀리에서 고정된 카메라. 클로즈업은 자제된다. 인위적인 미술을 지양한 채 사실적 배경을 추구하면서 발생하는 현실감은 집요하게 관객을 불편한 서사(부조리) 앞에 불러 세운다. 관객을 시종일관 괴롭힌다. 영화 <시>에도 이러한 면모는 그대로 이어진다. 


     윤정희는 극중 주인공 양미자 배역을 맡았다. 미자씨는 <밀양>의 전도연과 같은 감정의 기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중견 여배우들의 능숙함의 기미도 없다. 왕년에 대스타였던 그녀는 연기에 있어서는 뛰어난 배우라는 평을 들은 적이 없다. 이는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연기는 탁월하지 않다. 그렇다해도 그녀가 양미자 역할을 맡은 것은 영화 <시> 에게 좋은 선물이다. 윤정희 특유의 '맹'한 연기가 빛을 발하는 미자의 모습은 영화가 나타내고자 하는 시에 대한 여러가지 관점 중 하나와 훌륭한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치매 초기 증세를 보이는 미자씨. 그녀는 대뜸 동네 문화강좌에서 '시'를 배우기로 결심한다. 수업에 들어가기 전, 그녀는 딸과 통화하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시인 기질이 좀 있지. 꽃도 좋아하고, 이상한 소리도 잘 하고."

초-중-고 교육과정을 거치며 우리는 시를 억지로 공부해왔고, 시에 대해 미자씨와 비슷한 생각을 품어왔다.   '가끔, 아주 가끔 폼날 때도 있기는 하지만 알 수 없는, 뜬구름 잡는 이상한 소리들의 나열'



 미자씨처럼 맹하고,  붕뜬 채 살아가는 캐릭터가 시를 쓴다는 영화의 설정은  우리의 시에 대한 일반적인과 생각과 부합하며, 이를 강화시킨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시'를 온전히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도 '시'를 그러한 관점으로서만 다루지 않는다.    


         

        <시>에는 김용탁과 황명승이라는 두 명의 시인이 나온다. 대중적 인기를 구가하는 섬진강 시인 김용택 시인과 2000년대 초반 미래파로 불리며 전위적 글쓰기로 문단에 일대 바람을 일으켰던 황병승 시인이 이름에서 자음 하나만 바뀌어 등장한다. 지극히 전통적, 서정적 글쓰기를 하는 시인과 난해한 글쓰기를 하는 시인 . '시'를 놓고 양 극단에 위치한 두 시인이 함께 등장하는 모습은 매우 흥미롭다. 특히 김용탁(김용택) 시인은 시 쓰기 강좌의 선생님으로 '시'란 무엇인가를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는 손에 사과를 들고 시를 설명한다. 


                                     "시란 잘 보는거에요." 


 이 말은 잘 쓴 시는 손으로 쓰고 좋은 시는 좋은 눈으로 쓴다는 시에 대한 일반론을 표현한 것이다. 일반론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김용탁 선생의 입을 통해 전달됬다면, 시가 어떻게 쓰여질 것인가는 미자씨의 모습을 통해 구체적으로 형상화된다.


 

        특이한 할머니 미자씨는 잔인한 현실과 마주한다. 손자(이다윗)가 친구들과 같은 학교 여자 아이(아네스)를 성폭행했고, 여자아이는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졌다. 그런데 남아있는 자들은 반성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손자, 친구들은 물론 아이들의 아버지들 조차 아이의 죽음 애도하기보다는 어떻게든 일을 조용히 넘어가기 위해 계산하고 있을 뿐이다. 미자씨는 이 상황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미자씨는 합의금 500만원을 당장 마련해야 한다. 감독은 부조리한 상황에  엉뚱한 성격의 미자씨를 세운다.  


         미자씨는 자신을 둘러싼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시를 쓰고, 시구를 찾는다. 그녀가 수첩에 기록하는 시구들은 잔인한 현실과는 관련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한 가지 기억해야할 것이 있다. 시(혹은 문학)는 작가가 대면한 현실(삶)과 별도로 자신의 텍스트가 마주하는 현실(시적 현실)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시적 현실은 작가가 대면한 현실보다 더 클 수도 있다. 작가가 마냥 현실을 반영하는 존재라면, 작가는 현실  이상의 것을 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문학 텍스트가 갖는 현실이 삶의 현실보다 더 큰 면을 갖고 있는 경우를 발견하곤 한다. 


         시를 쓰는 행위는 다른 글쓰기에 비해 특별하다. 시는 시인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시 쓰기는 기존의 체험, 지식 이상의 것들이 나를 덮치는 것을 경험하는 활동이다. 다시 말해서,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도래하는 것이다. 이 말은 시의 주인은 시인이 아니라 '시' 그 자체라는 것을 가리킨다. 순간순간 도래하는 시적 진실에 자신을 개방하는 시인의 행동은 새로운 주체를 만든다. 시적 현실은 때때로 순간적이며, 순간 순간 얼굴을 바꾼다. 그래서 명확하게 개념화되어 있는 삶(혹은 작가 개인의 삶)과 시적 현실은 필연적인 논리관계에 얽메이지 않는다. 


         미자씨는  '피처럼 붉은 꽃'이라는 다소 상투적인 시구를 떠올린다. 개인적 현실(그녀를 괴롭히는 현실)과 무관한 자연을 묘사한 상투적인 시구. 이어서 그녀는 계속 시를 쓴다. "살구나무가 몸을 던진다, 다음 생을 위해"  여기에서 우리는 그녀가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죽은 이(아네스)를 애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시구들은 그녀의 의식적인 '의도'에 장악되고 있지는 않다. 


           미자씨는 성실하다. 그녀는 문화센터에서 들은 시의 출발점은 '잘 보는 것'이라는 말을 기억하고, 실천한다.  '잘 보는 것'을 바탕으로 시를 쓴다. 그녀는 시를 통해 스스로가 자신이 애도하는 줄 모르면서 애도하는 자. 슬퍼해야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슬퍼하고 있는 자가 된다. 그녀는 시를 쓰는 과정에서 자신을 둘러싼 현실의 개별 순간에 누구보다 충실하게 대면한다. 이를 통해 그녀는 비정한 세계를 뛰어넘는 진정으로 '착한'사람이 된다.


         문학의 가장 깊은 자리는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는 '타자성'에 있다. "아네스의 노래"라는 시가 낭독된다.  미자씨의 내래이션이 아네스의 목소리로 바뀌는 연출은 이러한 '타자성'이 명확히 나타나는 지점이다. 미자씨는 시를 통해 죽은 소녀의 자리를 찾아간다. 미자씨는 소녀(아네스)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마음에 닿게 되는 순간, 그녀는 '죽었으니 애도해야한다'는 당위의 차원을 뛰어넘는다. 미자씨는 소녀의 현실도 자신의 현실로 받아들인다. 그녀는 의도치 않게, 무의식적으로 앓는 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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