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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ut to Frame Mar 15. 2016

[Cine] 구원을 거부하소서

영화 [안티 크라이스트](Anti Christ,2009)




우리 모두가 ‘죄인’이다.

  

  영화 『파리넬리』(1994)로 익숙한 Lascia ch'io pianga(울게 하소서)가 울려 퍼진다. 애절한 울부짖음을 배경으로 남자와 엄마는 성교 중이다. 남자와 엄마는 흥분 상태다. 그들에게 부모로서의 책임의식은 이미 저 멀리 날아가 있다. 그때 아이가 움직인다. 아이는 자신만 빼놓고 놀고 있는 남자와 엄마를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발가벗고 몸을 뒤섞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 흥미를 느꼈을 수도 있다. 이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아이는 아장아장 걸어 창 밖 너머로 떨어진다. 아이가 죽었다. 아이를 신경 쓰지 못하고 흥분에 취해있던 남자와 엄마는 ‘죄인’이 되었다. 니체의 글 「안티 크라이스트」와 같은 제목을 갖고 있는 영화 『Anti Christ』(2009)의 출발이다. 


        기독교에서 신은 우리의 ‘죄’ 때문에 고통을 가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죄로 인해 신의 곁에서 쫓겨났으며, 우리 죄를 구원하러 오신 자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 누가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삶의 고통과 시련의 바탕에는 ‘죄’가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고 견디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 영화의 주인공 남자와 엄마, 그들은 죄인이다. 섹스에 빠져 아이가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는지 신경을 쓰지 못했다. 아이의 죽음은 남자와 엄마 때문이다.


        니체는 이러한 기독교 교리에 순응하는 우리들에게 “스스로 고문대에 몸을 맡긴 동물"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남자와 엄마는 넘치는 성적 에너지를 발산하며 섹스를 했을 뿐이다. 그리고 아이는 스스로 낙하했다. 니체는 그들은 결코 죄인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보통의 우리들에게 이 질문은 매우 불순할 수밖에 없다.


       ‘1. 부모가 섹스를 했다 2. 그 사이에 아이가 죽었다. 3. 그러므로 부모는 죄인이다’라는 논리는 세계에서 ‘보편’의 이름으로 성립된다. 그래서 남자와 엄마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하며’ 죄인이 ‘되어야 한다.’ 먹지 말라는 열매를 따먹은 죄로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난 아담과 이브처럼 그들은 죄인이 되었다. 혹시 눈물이 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들은 눈물을 흘려야 한다. “신이시여, 저를 울게 하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Lascia ch'io pianga



애도의 정석 

       

  두 사람 모두 아이가 죽었다는 현실에 절망하고, 아이를 애도한다. 그런데 애도의 양상이 다르다. 남자는 아버지로서 아이의 죽음을 슬퍼하지만, 동시에 그의 아내(엄마)의 병을 치료하고자 한다. 그의 정신은 몸을 장악하고 있으며 통제가 가능하다. 그의 행동은 우리가 사는 세계(보편)의 가치에 부합한다. 그는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책임을 지려고 한다. 가족의 한 축이던 ‘아이’가 사라졌지만 가족의 체계는 유지되고 있다. 아버지가 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직업적 특성을 살려 아내를 돌보는 훌륭한 남자이다. 


        엄마는 다르다. 끓어오르는 슬픔을 주체하지 못한다. 마음속 엉켜져 있던 실이 한꺼번에 풀려나오는 것처럼 슬픔을 쏟아낸다. 이내 슬픔이 정신과 몸을 차지해버린다. 몸이 아프다가도 갑자기 남편과 섹스를 갈구한다. 그녀를 바라보다 보면 신경증이 전염될 것 같다. 아이가 죽은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보편의 기준으로 볼 때 엄마의 행동은 과잉이고 불필요하다.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그녀는 정돈되어야 하고 안정의 방향으로 유도되어야 한다. 니체는 “영혼이야말로 신체 속에 있는 그 어떤 것에 불과하다”라고 신체는 정신보다 열등하고 죄의 유도자 역할일 뿐이라던 서양 철학 역사 전반에 반기를 들었다. 이 관점으로 바라보면, 그녀의 행위는 다른 어떤 행위보다 성실하고 넘쳐흐르는 것이다. 반면 남자의 그것은 신체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욕망이나 충동을 감추고 기만하는 행위이다. 


         『Anti Christ』는 니체의 철학을 급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알려진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작품이다. 니체의 저서를 바탕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영화는 뚜렷하게 反보편, 反 기독교적 가치를 지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세계(보편)에서는 남자의 애도 방식이 권장되겠지반, 영화는 엄마의 애도 방식을 긍정한다. 니체의 사유는 ‘모든 보편의 생각을 뒤집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래서 보편의 세계에 취해 온 몸을 안정적인 벽에 기대고 있던 관객은 불안하며 예상할 수 없는 모습을 긍정하는 영화의 가치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Anti Christ』가 갖는 난해함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갈비뼈 1쌍 

   

   영화 중반부, 숲에 들어온 이후 여자(엄마)의 非정상성은 가파르게 상승한다. 성적 욕망을 분출하는 것은 초반과  마찬가지이지만, 강도는 훨씬 폭력적이고 세졌다. 마치 괴물을 보는 듯하다. 무차별적인 폭력과 광기를 폭발하듯이 쏟아낸다. 숲으로 들어오기 이전, 그녀의 모습(애도의 상황) 또한 보편의 기준에서 非정상적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숲에서 그녀가 자신이 치료되었다고 하는 순간, 그녀의 非정상성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여성이 니체를 읽는 것은 곤혹스러운 일이다. “학구적인 성향을 지닌 여자에게는 성적 결함이 있는 것이 보통이다.”, “여자들에게 가렸는가? 그러면 채찍을 잊지 말라!.”라는 말처럼 그의 이야기 속 여자들은 그가 혐오했던 노예들과 동일시된다. 니체는 형이상학적 본질(신)이나 고정된 자아(ego)를 비판하고, 우리 속에 순간순간 새로이 창조되는 새로운 정체성(욕망)을 생산해야 한다고 외쳐왔다. 그래서 니체의 철학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차별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해 온 전통에 반기를 들어온 페미니스트들과는 매우 궁합이 잘 맞아야 할 것만 같다. 하지만 그 반대이다. 그 이유는 니체가 겨냥한 지점은 당대의 여성들, 그리고 그들이 지향하는 가치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19세기의 여성(페미니스트)들은 독립된 ‘여성성’이 아닌 남성처럼 되기를 원하였다. ‘여자는 부드러워.’ ‘여자는 상냥해’ ‘여자는 섬세해.’와 같은 여성성은 남성적인 것의 거울상(相)에 불과했다.  여성이 생각하는 ‘여성’의 이미지는 사실상 남성의 생각에 의해 규정된 것이며, 이에 순응하는 여성들은 니체의 눈에는 스스로를 옭아매는 노예로 인식된 것이다. 


        영화 속 여자의 非정상성의 폭주에는 이러한 양상이 잘 나타나 있다. 여성이 남성 이데올로기에 의해 수난받아온 역사를 연구했던 여자는, 어느새 남성의 생각(보편)에 의해 공동체를 위협하는 사악하고 추악한 존재인 ‘마녀’로 규정되었던 그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다. 하지만 보편적인 가치의 반대편을 향해 질주하는 그녀의 탈-여성적 행보는 새로움을 창조해내지 못한다. 탈- 여성적 행보 또한 여성성을 규정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여성성은 별도로 규정될 수 없다. 사회가 만들어 온 여성성은 존재해 왔지만, 그것이 여성에 대한 참된 규정은 아니다. 여성은 정의될 수 없는 성이다. 그래서 폭력적이고 타인의 힘을 빼는 방식으로 보편적 세계의 질서에 역행하는 모습은 역설적으로 그녀가 보편의 세계에 귀속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성경은 신이 아담이 잠든 사이 그의 갈비뼈 한 쌍을 빼서 이브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결말부 수많은 여자들이 산을 오른다. 그들의 얼굴은 지워져 있다. 갈비뼈 1쌍을 빌려와 만들어진 그들은 얼굴(개별성)이 존재할 수가 없다. 주인공 여자가 보여주는 광기는 전반부의 이상 행위(애도)와는 달리 매우 불성실하다. 자신이 빌려온 갈비뼈 1쌍임을 인정하고 스스로의 얼굴을 지우는 행위에 그칠 뿐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Anti Christ』에서 기독교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나 비판은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극히 反기독교적이며 反윤리적이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지 않거나, 종교의 비합리성에 진저리 치는 사람들 중에 몇몇은 이 영화가 가진 기독교에 대한 공격성에 크게 환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그 공격이 자신의 가슴 또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간과했다. ‘보편적인 현실' 속에 서로가 죄의식을 공유하고, 상대를 노예로 삼는 구조는 우리가 사는 세계의 가장 근본적인 작동원리이다.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우리는 같은 세계를 설정하고 이를 공유하며 서로의 의지를 억제하며 살고 있다. 


    『Anti Christ』가 반대하는 Christ는 우리 모두를 가리킨다. 스스로의 가능성을 억제하고, 보편이라는 허위 속에 참된 현실을 지워버리는 모두에게『Anti Christ』는 가혹하게 다가온다. 영화는 '보편’이라고 칭하는 우상의 폭력성과 허위를 고발하고 파괴한다. 이어서 구원을 구걸하는 것을 멈추고, 한 명의 개인으로서 현실에 대면하기를 재촉한다. 『Anti Christ』는  반인간적인 영화인 동시에,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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