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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ut to Frame Mar 13. 2016

[讀] 낯익은 것과의 낯선 만남

시인 이장욱의  시집「정오의 희망곡」 -2012년 과제

   


대학교 1학년. 한 달 간 연애를 했던 한 살 위 누나는 내게 [정오의 희망곡]을 선물했다. 그 누나는 국문과였다. 당시에는 학부제였기 때문에 2학년 때 전공을 선택해야 했다. 실연이라는 현실을 인정 못했던 나는 그 누나가 있는 국문과에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어쨌든 그렇게 이장욱이라는 이름을 처음 만났다. 국문학과 학생이 된 나는 그 후에는 수업 중에 소설, 평론 등 다양한 문학 장르에서 그를 빈번하게 만날 수 있었다. 이장욱은 시인, 소설가, 평론가로도 일취월장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지 그의 이름이 내게 익숙하다고 해서 그의 시가 쉽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의 시들을 우선 논리적으로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논리적 사고를 방해하는 그의 끝없는 환유적 연쇄 사고 속에 헤매는 과정이 결코 불쾌하지 않다. 논리 체계를 발견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불안을 느끼면서도 그의 시는 좋은 감정을 불러온다. 

 

 시집의 제목은「정오의 희망곡」. 정오에 라디오에서 울리는 시청자 사연과 희망곡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시를 통해 우리는 익숙했던 ‘정오의 희망곡’을 낯선 느낌으로 만난다. 낯선 감정은 이상함, 모호한 기분을 일컫는다. 이장욱의 시집「정오의 희망곡」에 수록된 시들은 낯익은 것과 낯설게 만났을 때 생겨나는 기분을 포착하고 있다. 


     그의 시에는 ‘나’와 ‘우리’로 지칭된 시적 화자, 대상들이 등장한다.‘나’는 이상하고도 우울한 세계를 좋아하기도 하며, 그대를 부르기도 한다. 우리가 됐다면서 서로 다른 곳에서 사랑을 한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나’, ‘우리’로 지칭된 존재들은 마치 영화 속에서 거리를 활보하는 군중 속에 외로이 홀로 서 있는 장면이 떠오른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근본적인 기분이 시 속에 형상화되어 있다.   

 

     1인칭(나, 우리)의 목소리는 어떠한 목적지나 시공간조차 의식하지 않는 화자의 태도를 드러낸다.(「우리는 여러 세계에서」- 시공간에 상관없이 화자는 사랑을 한다) 화자는 세계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하며 자신의 주체성을 내세우기보다는 여기저기 부유한다. 이장욱의 시에서 1인칭 목소리는 세계라는 풍경 속에 스며들어 다른 시어와 같이 하나의 풍경이 되고 있다. 


 우리는 근대(모던)라는 공통된 시대 개념을 공유하며 살고 있다. 근대의 근본적인 기분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cogito적 사유로부터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사물을 대상화시키고 그것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전지전능한 능력으로 파헤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유는 근대 과학 문명의 발전을 가지고 온 근본 사유가 되었다. 이러한 사유가 과학, 기술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고는 하지만 이를 인간의 근본 사유라고 할 수는 없다. 시라는 것, 시인이라는 사람은 자신 앞에 도래하는 세상에 자신을 최대한으로 개방한 사람이다. 시인이 세상에 자신을 개방한다는 것은 사물을 유심히 살펴보고 분해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시선이다. 시인의 눈에는 우리가 보는 것과 전혀 다른 세계가 보일 수밖에 없다.


 [정오의 희망곡]을 읽으며 시인 이장욱은 자신을 최대한으로 그의 앞에 도래한 현실에 자신을 개방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에게 느껴지는 근대란 그의 평론집 제목 혹은 시 제목 [나의 우울한 모던보이]처럼 우울할 수밖에 없다. 관찰하고 파헤쳐야 하는 세계, 나와 세계를 분리하는 체계 속에서 화자는 우울할 수밖에 없다. 도래하는 현실에 몸을 던지며 살 수 있었던 시대와는 정반대의 시각을 강요하는 세계가 이장욱이 생각하는 근대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근대라 명명된 cogito 사고의 세계 속에서도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 그가 쓴 현실이 반영된 시에서 1인칭 화자의 주체성이 결여된 목소리는 근대를 규정짓는 입장에서는 한없이 부실한 약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장욱의 세계에서 주체성이 상실된 자아는 도래하는 현실에 개방한 자를 표현하는데 최적의 목소리이다.

 

 오늘날 근대의 시선으로 보면 엄연히 이장욱의 시 속 화자의 위치는 약자이며 한 없이 부족한 루져일 뿐이다. 그래도 그의 시를 보면 왠지 기분이 좋다. 관찰과 탐구의 시선을 바탕으로  자본과 탐욕을 긍정하는 세계에서 부유하는 목소리일 뿐인 그의 시가 좋다.  그것은 근대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시선이 인간 본연이 추구하는 가치와는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구적,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속에서 상대적 빈곤과 공허함을 느낀다. 기술의 발전이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수없이 확인하지만 자연을 파괴하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전부를 걸고 매달리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다. 50년, 60년 전처럼 자연을 노래한 서정시에서도 더 이상 우리는 위안을 얻지 못한다. 순환론적 자연관은 더 이상 우리에게 효용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이장욱은 우리를 지배하는 근대적 사고와 충돌하며 도래하는 세계에 개방한 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 앞에 세워놓고 관찰의 눈으로 바라봤을 때 낯익었던 대상이 순간 드러내는 자신의 본질에 우리는 낯섦과 함께 그 대상의 본연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근대 사고 체계 속에 파묻혀 이를 망각해왔지만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 순간을 욕망한다. 이장욱의 시는 그 순간을 포착하고 긍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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