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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ut to Frame Mar 13. 2016

[Cine] 브레이크를 밟아다오

[바시르와 왈츠를](Waltz with Bashir,2008)


대학살


   1982년 레바논.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는 3천 여명의 무슬림을 죽였다.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로 진군 중이던 이스라엘 군은 이 사건을 목격했지만 눈을 감았다. 역사는 이를 ‘사브라-샤틸라 학살'로 이름 붙였다.  이 사건은 여전히 정치적 공방 속에 있다. 책임여부와 진상 규명, 화해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바시르와 왈츠를]은 '사브라-샤틸라 학살'에 대한 개인의 기억을 다루는 영화이다. 주인공은 아리 폴만 감독 자신이다. 당시 그는 이스라엘 군으로서 학살의 현장 근처에 있었다. 하지만 당시를 기억하지 못한다. 실체는 없지만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불편함만 품고 있을 뿐이다.


        인간은 존엄한 존재이다’라는 선언이 보편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인간은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우리는 상식이 무너지는 모습을 쉽게 마주한다. 아우슈비츠에서, 르완다에서, 난징에서, 인간이 인간을 파괴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의 사건으로 인지하지만, 비극의 이면에는 이야기와 맥락이 존재한다. 아무리 영화를 잘 만드는 사람도 대학살을 완벽하게 재현해내지 못한다. 이야기는 선택될 수밖에 없어서다. 누군가는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 어떤 이는 인간애를 말했다. 혹자는 가해자를 변호하기도 한다. 한 사건에 대해 모두를 만족하는 선택은 있을 수 없다. 다만 사건을 보다 정확한 위치에서 마주하고 사건에  성실하게 다가가는지 여부만 판단할 뿐이다.  


 사건을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며 얼마나 치열하게 다가가는가.  측면에서 [바시르와 왈츠를]은 매우 특별한 영화다.      



기억을 잃다      


 주인공이자 감독인 아리폴만. 그는 친구와 술자리를 가졌다. 친구에게 꿈 이야기를 듣는다.  친구는  26마리의 개에게 쫓기는 악몽에 시달린다. 주인공은 놀란다. 그는 분명 대학살 당시 레바논에 있었다. 참사를 목격할 수밖에 없었다.  25년이 지난 지금, 그는 친구와 달리 당시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무엇을 본 것일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무엇을 잊은 것일까?  왜 기억이 사라졌을까?  혼자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 머리 속에는 학살과는 관련이 없어 보이는 장면 하나가 남아있다. 역사에는‘사브라-사틸라 대학살'이라 명명된 사건이 기록되어 있었다.  역사적 사건에 물리적으로는 가까이 있었지만, 그는 기억을 잃었다.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떠난다. 함께 전쟁을 치른 동료, 목격자, 조언자들을 만나기 위해.



사람이 될 것인가


  그는 사람들을 만난다. 당시를 기억하는 양상은 각기 다르다. 깨져있던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씩 그의 앞에 나타난다. 정신과 의사인 친구가 주인공에게 충고한다.


“대학살에  대한 자네의 관심은 그 사건보다 훨씬 오래전에 생긴 거야. 다른 학살에서 비롯된 거라고… 그러니까 대학살이란 여섯 살 이후로 자네와 함께해 왔어. 자네는 그런 학살과 수용소들을 통과하며 살아왔고”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스는 고문과 실험을 자행하며 400만 명이 넘는 유대인을 죽였다. 주인공(아리폴만)의 부모님도 아우슈비츠에서 겨우 살아남았다. 이후 몇십 년이 지났다. 기독교를 믿는 민병대원들이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학살했다. 유대인의 자손은 이스라엘의 한 병사로서 이를 목격했다. 참혹한 학살의 방관자가 되며 나는 기억을 잃었다.


         전쟁이 끝나고 전범 재판이 열렸다. 재판 중 가장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은 단연 유대인 학살 문제였다. 강제수용소를 만들었던 헤르만 괴링도, 뒤늦게 잡혀 재판을 받은 아돌프 아이히만도 교수형을 당했다. 하지만 망각은 반복됐다. 한국전쟁에서도, 방글라데시에서도, 캄보디아에서도, 르완다에서도, 대학살은 되풀이됐다. 새로운 학살의 참혹함에는 질색하면서 과거의 기억은 쉽게 지워졌다. 주인공이‘사브라-사틸라’ 지역에서의 기억을 지웠던 것처럼.


        과거를 마주하는 여행을 마치며, 감독은 말한다. 자신의 가슴 한 편에 있던 불편함, 그것을 대면하는 일을 시작하라고, 그리고 잃었던 기억과 마주하라고. 모두가 기억을 잃어야 이 무시무시한 도돌이표는 끝이 날 수 있다. 반복해온 참혹한 역사에 브레이크를 밟으라고 호소한다. 참혹하고 끔찍한 기억. 다시 또 괴물이 되고 싶지 않다면. 사람으로 살고 싶다면 바라보아라. 더 아플수록 사람다워지는 일이다.


        [바시르와 왈츠를]이 불편하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다. 유대인 학살 문제를 언급하는 순간, 이스라엘 군의 ‘방관자’ 입장을 강조하고, 나름의 면죄부를 주고 있으며 이스라엘 정부를 두둔한다는 게 비판의 이유였다.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사브라-사틸라 학살’을 놓고 하나의 절대적인 기준을 세울 수는 없다. 3천여 명이 억울하게 죽었다. 최소한 3천 개의 다른 이야기가 있다. 그런 점에서 무엇을 두둔하고, 비판하느냐가 이 영화를 평가하는 최적의 기준은 아니다. 이스라엘 군인으로서 참극을 대면한 아리 폴만이라는 한 개인의 이야기를 잘 다루고 있느냐가 평가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탁월한 역설


 [바시르와 왈츠를]의 형식을 단정할 수 없다. 단순히 실사 다큐멘터리 위에 애니메이션이라는 도구를 입힌 것이 아니다. 다큐멘터리로 한번 만들어진 다음 다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이중의 결과물이다. 애니메이션은 실사 다큐멘터리가 할 수 없는 무한한 표현을 가능케 한다.  


        영화는 ‘사브라-사틸라 대학살’에 대한  한 사람의 기억을 바라본다. 기억을 구성하는 꿈, 잠재의식, 전쟁, 마약, 사랑. 실사 다큐멘터리 형식으로는 표현하기 힘든 장면들이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를 극복한다. [바시르와 왈츠를]에서 애니메이션은 단순한 도구를  넘어 주제를 형상화해내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뱃멀미에 고생하던 주인공의 친구. 잠깐 잠이 들어 꿈을 꾼다. 바다의 여신처럼 보이는 여자가 다가와 배 위로 올라온다. 엄청난 거인. 그는 그녀의 몸에 아기처럼 안겨 바다를 유영하고, 그때 그가 타고 있던 보트는 폭발한다.


        [바시르와 왈츠를]이라는 제목을 붙여준 시가지 전투 장면. 주인공의 동료는 적과의 교전 중 참지 못하고, 동료의 기관총을 뺏어 전장 한 가운데로 뛰쳐나간다. 난사를 시작한다. 기관총의 반동은 그에게 마치 왈츠를 추는 듯한 반동을 선사한다.  배경음악으로 왈츠가 깔린다. 전쟁이 가진 아이러니가 함축적으로 표현된다.


      ‘사브라 사틸라 대학살’이라는 사건을 놓고 객관은 존재할 수 없다. 수많은 주관적인 시선 중에 ‘성실한 관점’이 있을 뿐이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게 반드시 성실함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더욱이 영화는 한 사람의 기억을 되찾는 과정을 통해 사건에 다가가고 있다. 응축과 대치를 겪은, 무의식 속에 은폐되기도 했던 기억을 되짚어가는 과정이다. 기억을 형상화하는 일은 더 환상적일수록, 더 사실적일 수 있는 역설적 상황에 놓여있다. 영화는 새로운 형식을 창조해 그 역설을 탁월하게 끌어안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고통스러운 기록이 덧붙여진다. 이를 통해 영화는 완성된다. 충격적인 실사 화면이다. 잃었던 기억을 되찾고, 온전히 사건을 대면한다. 사건에 대한 개인의 기억이 바라보는 관객들에게도 고통으로 전해진다. 다큐멘터리와 애니메이션이 만나 생긴 새로운 형식은 <바시르와 왈츠를>을 위대한 영화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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