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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ut to Frame Dec 16. 2016

[Cine] 최소한 사람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 2016)]

합리적이며 정당한 질서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주인공 댄은 국가 권력에 의해 곤경에 처한다. 국가 시스템은 누구든, 어떠한  사정을 갖고 있든 엄격하게 집행된다. 그것은 결코 타락하거나 부패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칭찬을 받아야 하고 장려되어야 할 면이 많다. 영화 속 행사되는 권력은 사회 전체의 효용을 극대화시켜야 한다는 원칙 아래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집행되고 있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생존의 위협으로 느껴진다 해도, 이에 저항하기는 쉽지 않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질서(시스템)의 근본적인 속성에서 비롯된다. 공동체를 규정하는 질서는 구성원들에게 자동화된 행동을  유도한다. 일종의 기계장치이기 때문이다. 이 기계는 개개인의 생활세계를 지배하는 질서는 모든 행위의 기준이 되며 무질서와 혼란을 예방하는 역할을 한다. 이를 거부하고 시시각각 나타나는 사안을 개별적으로 구분하며, 구체성을 일일이 살피는 것은 예외적이며 잉여적 행위가 된다. 혹 지배계급과 정치권력이 어떤 방식으로 자원을 독점하고, 질서를 억압의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기계장치를 내재화하며 시스템의 일원이 된 개인이 그것을 부정하며 스스로가 잉여가 되기를 택하는 일은 어렵다.  


     두 번째는 지금의 질서가 매우 영민한 데 있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근대국가를 완전한 강압도, 완전한 동의도 아닌  '강제의 철갑을 두른 헤게모니'라고 불렀다. 국가를 넘어 전 지구적 공동체를 상정하는 21세기, 외적으로 강압적인 면은 거의 사라졌다. 공동체는 다른 무엇보다 선거, 의회 민주주의, 법과 같은 합의된 '절차'를 거듭 강조한다. 현대의 질서는 이를 통해 권력을 부여받고  정당성을 갖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러한 '절차'는 과거의 체제들이 대처하지 못해 자멸의 원인이 되었던 모순을 통제하는 수단이 된다. 이처럼 다수의 합의를 바탕에  둔 질서는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지만, 그 질서 자체가 가진 오류의 가능성은 질문받지 않는다. 절차가 지켜진다면, 그것은 합리적이며 정당한 권력행사가 된다.


       영화의 배경은 영국 뉴캐슬이다. 영국은 오늘날 질서의 뿌리가 되는 민주주의, 자본주의를 가장 오랫동안 유지하며 이를 발전시켜왔다. 신자유주의라고도 불리는 오늘날의 질서가 가장 고도화된 형태로, 그리고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곳이다.  반복한다. 영화 속 국가권력은 실수를 하지 않는다. 합리적이며 정당하게 그 힘을 사용한다. 그럼에도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는 스스로가 질서의 예외가 되는 것을 선택하려 한다. 나아가 영화는 그를 통해 합리적이고 정당한,  그래서 견고한 질서의 모순을 폭로하고자 한다.

 



리얼리스트-함께 하기


     켄 로치는 50여 년 간 영화를 통해 현실의 문제를 고발해왔다. 영화를 통해 (좌파적)'리얼리즘'을 구현한 감독(작가)으로 불린다. 그가 영화를 만들어온 시간 동안 세상은 변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세계는 더욱 정교하게 모순을 통제한다. 그럼에도 켄 로치는 2016년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도 자신이 일관되게 지키고 발전시켜온 태도를 고수한다. 그리고 이는 질서에 대한 강력한 위협이 되는 동시에 감동이라는 영화예술의 본령도 성취해내는 원동력이 된다.


    '리얼리즘'이라는 말은 강렬한 목적성을 띤다. 투쟁적 이미지, 이상을 지향하는 뜨거운 정념을 떠올린다.  켄 로치의 영화들, 그리고 [나, 다니엘 블레이크]도 결과적으로 리얼리즘 영화이다.  하지만 리얼리즘이라는 말은 그의 영화적 방법론을 엄밀하게 설명하는 데 있어 타당하지 않다. 더욱이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감상하는 데 있어 '좌파', '사회주의'와 같은 개념은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이 되는 경우가 많다. '21세기 신자유주의에 대한 리얼리즘적 저항'과 같이 영화의 주제의식만을 강조하는  수사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특별함을 설명할 수 없다. 정확하게 보고자 한다면 리얼리즘과 리얼리스트를 구분해야 한다. 켄 로치는 영화를 통해 (진보적) 리얼리즘을 구현하는 것보다 '리얼리스트'의 태도를 우선하는 작가이다.  그의 리얼리스트적 태도는 많은 영화 중에서도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유난히 빛을 발한다.

 

     리얼리즘이 현실을 조망하고, 역사의 총체적 전망을 고려하여 변혁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우선한다면, 리얼리스트적 태도는 세계를 부분적으로 바라보고,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욕심(야심)을 뒤로 미루도록 한다. 리얼리스트에게 중요한 것은 체험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세계의 부분(조각)을 잘 바라봐야 한다. 영화 속 카메라는 댄, 케이티 가족과  동일선상에서 나누는 경험에 집중한다. 질병수당, 실업수당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댄, 눈 앞의 생계가 까마득한 나머지 생활고에 시달리는 케이티 가족의 모습, 그리고 댄과 케이티 가족 사이의 교류가 담담하게 그려진다.  


        시퀀스들을 블랙으로 페이드 아웃시키며 마무리한다. 이러한 편집은 각 시퀀스가 완결성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완결성을 갖는 시퀀스들 간 관계는 느슨하다. 개별 시퀀스가 '저항', '변혁', '고발'과 같은 영화의 주제의식에 정확하게 수렴되지 않는다. 아마도 각 시퀀스의 이름을 붙인다면  '케이티 아이들과 놀아주며 물고기 모빌을 만드는 댄', '푸드뱅크에서 케이티(엄마)에게 있었던 일'과 같이 등장인물의 일상이 될 것이다. 이야기의 논리나 감정의 증폭보다는 사람의 일상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는 결코 관조의 시선이 아니다. 주된 시점이 '바라보기'처럼 보이지만 더 방점이 찍혀야 할 부분은 '함께 하기'이다. 카메라가 밖에서 실내의 사람을,  안에서 밖의 사람을 바라보는 모습은 지양된다. 카메라는 댄, 케이티 가족과 함께 공간을 공유한다. 3자의 시선으로 대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관객은 영화 속 사람들(댄, 케이티 가족)과 함께 하며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이 행하는 작은 연대, 그리고 그것을 짓밟는 비정한 세계를 직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세는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상투적이지 않게 열렬히 희망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희망을 말하기- 최소한 사람


    이러한 체험만으로는 세계의 어둠을 걷어낼 수 없다.  관공서 벽에 락카칠을 하며 "나, 다니엘 블레이크" 선언을 하는 댄을 힘껏 응원한다고 쳐도, 냉정히 말해 이는 사소한 몸짓에 그칠 뿐이다. 결국 댄도, 케이티 가족도, 그리고 이를 함께 하는 관객(혹은 감독)도 무언가를 기원하는 세상을 바꾸는 주체가 되지 못한다. 주인공의 죽음으로 끝나는 결말은 씁쓸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영화를 본 우리는 알고 있다. 영화 스스로가 지금 이 세계의 '희망'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과 불화하는 텍스트는 많다. 들끓는 정념을 엽기적으로 발산하기도 하고, 행동하거나 변화를 이끄는 주체를 내세워 세상과 맞서기도 한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의 질서는 무척 똑똑하고, 치밀하다. 크게 몸부림칠수록 모순은 은폐되고, 질서에 포섭되는 게 다반사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함께 하기'라는 불화의 방법은 소극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는 단순히 '함께하기'만을 하고 있지는 않다.  댄과 케이티 가족은 '질서'의 기준에서는 무능한 패배자들이다. 하지만 '사람'을 우선하는 이라는 관점에서 그들은 이타심을 발현하는 '천사'들이다. 영화는 결말에 다다를 때까지 '최소한 사람'임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비정한 세계와 팽팽한 긴장을 이어나간다.


     마지막 케이티의 입을 빌어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편지가 전달된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의 점도 아닙니다. 나는 묵묵히 책임을 다하며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나는 굽실대지 않고 이웃이 어려우면 기꺼이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나의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나는 (최소한) 사람입니다"라는 메시지.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을 지적하지 않음에도 그것을 가장 적나라하 폭로한다. 죽은 자의 소박한 선언을 통해 역설적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비관이 된 듯한 현실에 희망을 말하고 있다. 댄은 죽었고, 케이티와 두 아이의 삶은 계속 험난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함께한 우리는 희망을 발견한다. 너무 포기하기 쉽고, 쉽게 포기해왔지만, 최소한 사람이라는 자존감을 지키는 것, 그리고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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