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을 가는 척하고 나온 혜정은 남자화장실을 슬몃 바라보았지만 큰 인기척이 나지 않아 두리번 거린다.
정한이 혹시 있나 없나 조바심이 나서 화장실문을 살짝 열고 빼꼼히 보았지만 빈 화장실이었다.
조심스레 화장실 문을 닫고 뒤돌아 서는 순간 복도 끝에 계단 참 즘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 아이 간지러워 죽겠어..."
"좀 참아봐, 잠깐이면 돼 "
올려다보니 계단참에 남자 둘이 보였다.
정환의 코트가 반쯤 벗겨져 있고 붉은색니트에 손이 들어가 꼼지락 거리고 있었다.
" 이 새끼 부끄러워 하긴 형이 그렇게 좋냐? 나도 좋아 인마. 애들한테 그냥 우리 둘이 사귄다고 커밍아웃해야겠다 ㅋㅋ"
" 미친 네가 여자나 남자나 안 가리고 다 껄떡거리니 이혼을 당하지. 형좀 고만 조물거리고 들어가자"
허걱 이게 무슨 소리인지 둘이 그렇고 그렇다는 말만 들었던 동성커플이었던 건가?
혜정은 정신이 어질어질해졌다가 잠깐 눈앞의 암전이 들어왔다 나가는 것을 느꼈다.
조용히 카페 안으로 먼저 들어왔다.
잠깐이라도 혼자 있고 싶어 졌다.
다시 자리에 앉은 정환의 일행을 보니 전부다 변태나 이상한 놈들만 모여 있는 것 같이 보이기 시작했다.
찬물 한잔 마시고 나니 조금 마음이 가라앉았다.
일단은 저들이 좀 눈앞에서 치워졌으면 좋겠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 오늘 많이 드신 것 같은데 계산서를 드릴까요? 자리 위에 조명도 손을 봐야 돼서 좀 마치셨음 해요"
" 아 우리 이제 시작인데 손님을 막 쫒고 그래도 되는 겁니까?"
배불뚝이가 또 저럴 줄 알았다.
" 전기가 좀 위험해서요 아까도 보셨잖아요 수리하러 왔다 간 사람"
" 야 많이 먹었다 집에들 일찍 간다고 낮술 한 건데 일어날 때도 됐구먼 일어나자"
혜정은 가급적 냉랭하고 사무적인 말투로 그들을 대했다.
갑자기 돌변한 태도에 어리둥절하던 일행들이 툴물거리면서 일어나기 시작한다.
우르르 빠져나가는 무리들을 지켜보며 서있을 때 정한이 고개를 돌려 내게 무어라 할 듯하다가 그냥 나가버렸다.
'자기도 마음이 쓰였던 걸까 내가 조금이라도... 그럴 리가 없겠지' 혜정은 테이블을 정리하는 것도 미루어 두고 멍하니 있다가 핸드폰을 들고 번호를 찾는다.
"여보세요 어 지연아, 나야 혜정이"
"언니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생일 축하해~~"
"말만이라도 고맙다 오늘 별일 없지 생일인데 언니가 좀 기분도 그렇고 시간 되면 나올래?"
" 어 안 그래도 저녁에 가려고 그랬어. 딴 사람은 몰라도 언니한테는 소개할 사람도 있고."
"어머 그새 남자가 생기거임? 축하해 누군지 나도 기대된다. 내가 아는 사람인가? 누군데?"
" 아이고 이따 보면 되지 뭘 자꾸 물어 이따 봐 언니..."
"어 그래 그래"
망할 년 눈치 없는 걸로 동네에서 두 번째는 할 것 같은 계집애 생일날 지 남자 친구를 데려온다는 게 뭐지 살살 짜증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냥 악의는 없는 아이는 그러려니 하는 게 속이 편할 듯했다.
이왕 이렇게 된 것으로 봐서 그 빨간 니트의 정한 은 자신의 인연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니트빛깔이 애매모호한 빨간이었다 자줏빛 같기도 하고 갈색 비스름한 진정한 빨강이 다시 눈앞에 나타나리라 생각을 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테이블을 정리를 마치고 인테리어 사장에게 아까 못한 조명등 수리를 오셔서 해줍시사 문자를 정중히 보냈다. 나란 연도 참 아까 그렇게 무안히 내쫓듯이 보낸 게 미안하기도 하고 아쉬울 때 도움이 되는 사람인데 신중치 못한 것 같았다.
"킁 안녕하세요?"
인테리어 사장이 바람처럼 문자를 받자마자 왔다
" 사장님 생일이라고 이걸 킁 여기 받으세요 킁"
"아이 뭐 이런 걸 다 가져오셨어요? 제가 신세도 많이 지고 뭘 드려도 제가 드려야지요"
"킁 아니 커 킁 누가 좀 사다드리라 코치를 해줘서 킁 킁 하여튼 축하드립니다."
"아 네..."
'뭐지 뭐지? 뭔가 좀 불안하다 혜정은 인테리어 사장이 전부터 자신에게 유독 친절하고 잘해주는 게 느낌이 남달랐다.
일단 외모나 스따아일이 내가 전혀 좋아할 구석이 없는 남자였다.
게다가 킁 킁 하고 말 한마디 나올 때마다 따라 나오는 콧바람소리는 정말 혼을 뺏는 악마의 속삼이 같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어쨌든 주는 거니 받긴 받았다.
사다리 위로 올라간 인테리어 사장은 바지가 짧은 건지 배가 나온 건지 바지춤이 자꾸 내려와 눈을 어디 둘지 모르겠다. 굳이 보고 싶지 않은 남자의 속살이라니...
어 그런데 정말 빨간색이었다.
완벽무결한 빨강의 색상이 눈에 들어왔다.
흘러내린 바지가 엉덩이에서 아슬하게 걸려있는 틈을 타고 인테리어 사장의 팬티가 쑥 올라와 있었다.
머리가 한 대 맞은 것처럼 모든 게 보이기 시작했다.
바람처럼은 저 킁 하는 콧바람이고 빨강이 인연이 되는 남자가 바로 인테리어 사장이라니....
소름 소오름 온몸에 털들이 일어났다.
점괘가 맞기는 맞나 본데 아 그렇구나
내 인생은 사랑은....
한동안 말이 없던 혜정이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지키다 눈을 반짝이며 각오에 찬 모습으로 인테리어 사장에게 다가갔다.
"고생하셨어요 사장님"
"킁 아 네 뭐 고생은 킁 별거 아닙킁 니다"
"저 우리가 조금 어울리는 인연은 아니라는 거 사장님도 아시고 저도 알고 그것 때문에 마음 고생하셨던 거 알고 있어요"
"킁 네? 킁킁 무슨?"
"제가 받아들일까 해요. 사장님이 조금 부족하지만 저를 그렇게 좋아하신다면 우리 만나보기로 해요"
"킁 킁 이게 무슨 말씀인지 킁"
혜정이 다시 또 구차하게 설명을 해야 하난 이 의뭉스러운 남자는 또 뭔가 생각을 하려는 찰나였다.
" 언니 뭐야? 우리 영철 씨한테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어"
"영철 씨 지금 이 상황 설명 좀 해볼래요 당장!"
혜정은 감짝 놀라 언제 왔는지 모르는 지연이 소리소리 지르는 통에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지연 언제 왔어? 영철 씨라니 누가 여기 사장님?"
"어 내가 사귀는 사람이야. 근데 언니야 말로 뭐라고 하는 거야 지금"
"영철 씨하고 만나보자고. 정말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당황스럽고 억울하고 헤정은 난감하고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자신이 오해했다는 창피함은 둘째치고 뭐라 해야 설명이 될지 어버버 하기 시작했다.
"아니 지연아 언니가 미안해 오해야 오해 나는 영철 씨가 속옷을 빨간색을 입자나 너무 완벽무결한 빨강이었거든 언니가 계속 찾던 남자였거든..."
"지금 뭐래니? 야 너 이 언니하고 뭔 일 있었던 거야? 속옷색깔을 언니가 어떻게 알아~"
" 지연아 그게 아니고 언니가 점을 봤잖아 궁합이 언니 하고"
"야 아악 아아악 둘이 궁합을 봐 뭐 "
"킁 아니 지연 씨 뭔가 킁"
"아 됐고 당장 따라 나와"
"지연 씨 킁 아니라니깐요"
"나오라고 나와"
"뭐예여 킁 킁킁 나한테 왜 이러는 그예 킁 요 킁"
혜정은 뭐가 뭔지도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크게 잘못은 된 것 같은데 그냥 모르겠다.
멍하니 그냥 한참을 서있었다.
가게를 나선 정환의 일행들은 하나 같이 씩씩대고 구시렁거리며 걷고 있었다.
K가 어깨를 치며 한마디 한다.
"야 정한아 인마 남자가 그리 숫기가 없어서 마음에 들면 든다고 이야길 해야지 이 그 이 그..."
"잘 보인다고 니트도 새로 사서 입고 오고 신경 쓴 넘이 택은 떼고 입어야지 몸이 불편하니 말인 듯 잘 나올까?"
친구들은 정한 이에게 한 마디씩 덕담 같은 비난을 쏟기 시작했다.
"위스키는 얼어 죽을 껍데기에 소주나 더 하러 가자"
일행들이 걸어가는 골목 어귀 즘 봄볕이 따라나가며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 넘의 사랑이 무어라고 평생 한번 사랑을 해보고 싶다는 정한의 한숨이 담배연기랑 비벼져 바람에 흩어져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