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지워지지 않은 H의 전화번호가 보인다. 저장이 되어있지 않다고 하여도 쉽게 잊히지 않을 번호지만 한참을 망설이다 전화를 건다.
일부러 받지 않는지 바쁜 건지 한 참을 지나서야 전화를 받는다
" 여보세요... 나야 잘 지내?"
"어, 무슨 일이야?"
" 택배가 왔어 레녹스랑 일리 머신... 내가 보내주려고 낼 모레즘"
" 어, 도착했구나 나도 잊고 있었네... 그냥 택배로 보내는 게 좋겠어."
" 아니 나도 그럴까 하다가 몇 달을 용케 깨지지 않고 한국에 왔는데 택배로 혹시 파손될까 걱정도 되고. 너무 부담 가지 지마 문 앞에 내려놓고 갈게"
" 그래 알았어 오기 전에 연락 줘"
전화를 끊고 후련한 마음이 반 살짝은 기대감도 올라왔다. 오래만의 전화 속 목소리는 여전히 맑았고 나긋나긋했다. 반면 그런 모습 이면의 화난 그녀의 높고 앙칼진 목소리가 오버랩된다.
H와 이별은 겨울이 오기 전 늦은 가을이었다.
늦은 나이의 연애라는 것이 그렇듯 사람을 만나는 일도 수월치 않고 마음을 주기도 어려운 반면에 사람에게 쉽게 포기하고 실망한다.
살아온 날들 동안 많은 상처를 입고 아물어 가면서 마음에 옹이는 더욱 단단해져 갔고 또 상처받는다는 것이 두려워 작은 일에도 민감이 반응을 한다. 때로는 내가 다치기 전에 먼저 상처를 주고 상처를 준 자책감에 스스로 더 상처가 되는 악순환이었다.
잠실 쪽 하늘을 보았다. 지금 차를 타고 강변을 달려서 늦은 시간 러시아워를 피해서 가면 3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연애 때는 매번 가는 길이 밀리고 고단해도 힘든 줄 몰랐다
해어지고 나니 마포와 잠실의 거리는 그녀와 나 사이의 마음만큼 멀고 먼 거리도 다가왔다. 남쪽 작은 마을 이름 모를 해변가를 찾아가는 것만큼 마음이 버겁기만 했다.
내가 다시 또 H와 같은 미모의 여인을 만나기는 이번 생에 틀린 일일지도 모른다 예쁘고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여성이었다. 그런 그녀도 사람이라 감정이 있겠지만 직설적이고 강한 성격은 생각보다 내게 큰 반향을 주었다나도 뭐 하나 변변한 게 없는 부족한 인간일 거다. 게다가 연애 중에 욱하는 성격을 자제하려 노력했지만 결국은 터지고 말았다. 자상한 척 애쓰는 척 하지만 듣기 싫은 소리에 삐죽거리고 비아냥 거리는 내 모습이 원래의 내 모습이었고 스스로 못났다는 느낌에 끝없이 자존감이 추락했다.
H와 헤어진 후 쓸데없는 모임과 쓸데없이 모이는 사람들을 쓸데없이 만나고 다녔고 종종 먹는 술은 늘 먹고 마시고 취해서 친구에게 전화를 하고 끝난 옛 인연들에게 전화를 하고 혼자 세상 고독과 외로움, 비통을 짊어진 듯 누가 시키지도 않은 비극의 모노드라마 주인공으로 살았다.
집안을 가득 채운 박스들은 아마 드라마를 찍는 도중 하나둘씩 사 모은 것 같다. 처음에 h의 부탁으로 레녹스 버터플라이 세트를 직구를 시작했는데 그녀와 헤어진 뒤로도 취중에 때론 맨 정신에 메이시스와 아마존 등등의 쇼핑몰사이트 장바구니에 마구 집어넣고 결재를 하였다.
그녀가 다시 돌아올 것을 기다리는 마음이었는지 외로움과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백화점을 가는 유부녀의 마음으로 하였는지 그 둘 다였는지...
어쨌든 지금 방에 가극 쌓인 저 박스들은 처치하기 곤란한 군식구가 되었다.
누이가 한식을 겸해서 올라 온후 그릇들을 나누어 주었다.
자신 때문에 결혼이 깨진 것 같아 어떻게 하나며 울먹이듯 말했지만 하나도 슬퍼 보이지 않았다
혼수는 여자가 해오는 것인데 설마 이 많은 걸 H가 사달라고 해서 산거냐?부터 총각 혼자 사는 집에 이런 것들이 오해받기 쉬운데 다 치워버리라는 등등 누이가 했던 말들이 다 짜증 나고 성질이 났다.
물론 내가 생각해도 이 수십 개의 박스들을 예뻐서 없는 시리즈별로 다 모으려고 샀다고 하면 안 믿을 것 같았다 나도 내가 이걸 산 게 맞나 믿지 못하고 있으니...
그래도 집을 신축하면서 주머니에 돈이 있게 되어 공금을 유용한 죄도 있으니 누이와 동생에게 나누어 주었다. 누이가 탐내는 것 중 좀 비싼 것들은 일부 남겨두었다 헤어졌어도 H를 생각해서인지 그냥 내가 좋아서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이것도 나중에 시난고난한 결혼생활에 암초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적어도 그 당시 내 상식과 소견으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