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서울국제도서전이 열렸었다. 최근 좀 책을 읽는 일에 관심이 생기다 보니 알고는 있었는데 이걸 예매를 하지 않으면 못갈 정도로 성황이었던 것은 예측하지 못했다.
남들이 다녀온 이야기들과 여기저기 떠도는 이야기들은 들려서 어떠어떠했다는 풍문만 들었다.
처음 공론화된 문제는 도서전의 주체가 사유화된 것에 대한 우려와 부당함을 토로하는 출판 및 작가들의 이야기였다. 맞는 말이면서도 출판이나 작가라는 것도 상업성을 무시할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려서 유야무야 묻히고 선정된 것을 보이콧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또 하나는 도서보다는 굳즈 전시회라는 비평이었다.
독서라는 것은 우리에게 실상 공부나 자기계발을 위한 마음의 양식에서 소비의 상품으로 넘어간지 오래되었다. 책을 보고 읽는 것은 일회성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옆에 끼고 살살녹여먹는 아이스크림이나 캐러멜이 아닌 한 입에 털어먹는 포카리스웨트나 박카스 같은 것이었다.
영화 한편을 보는 돈이었고 좀 좋은 점심한끼를 위한 지출만큼 저렴하다면 저렴한 소비재이다.
그런맥락에서 보면 도서관련 굳즈들은 실용성과 효율성보다도 디자인이 또 그냥 존재자체로 멋지고 탐이나는 상품이 될 수 밖에 없고 책을 사는 소비행위에서 모자란 욕망들을 채워주는 역할을 한다.
책보다 책커버가 두배는 비싸고 작은 종이쪼가리 같은 메모장이나 클립들이 책값을 견주기도 한다. 실상 책보다도 부록을 탐낸 것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자전거를 받기 위해 신문을 구독하기도 했으며 잡지들은 구독부수를 유지하기 위한 미끼들을 넣은적이 많았다. 대중적인 인기가 없는 분야일 수록 그런 경우가 많았다. 재즈잡지를 일년 구독하면 페스티벌 티켓이나 앨범을 주기도 했고 인기작가의 소설판매량을 늘리기 위해 한정판 표지나 굳즈를 배포하기도 한다.
그래 그정도면 봐줄만 하다 오죽하면 고육지책일까 싶기도 하니 말이다. 그 예전 젊은사람들은 일본패션잡지를 사는게 유행이 된 적도 있었다. 실상 잡지의 내용보다 부록으로 끼어주는 앙증맞은 지갑이나 에코백을 위하여 지갑을 열었다.
지금은 경제권을 뺏겨 안 그런지 오래지만 나도 독립서점에서 파는 굳즈나 어디 행사에서 파는 잡다구리한 것을 지나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었다. 예쁘다는 것 하나만으로 쓸모는 생략되고 만다.
도서전의 굳즈에 열광하는 젊은 이삼십대의 독자들을 보면 케이팝 스타의 사생판이 떠오르기도 한다.
꼭 젊어서라기 보다는 사람들은 매혹되기 쉬운 존재이고 그 매혹이란 단면을 뜯어보면 꿈과 욕망이 비쳐진다. 이루지 못한 것들과 이루고 싶은 것들은 돌려말하면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이다.
우리가 원하는것들은 내안에 가득한 것들이 아니다. 꿈을 꾸지만 채울 수 없었던 그 무엇이다.
소비가 일어나는 마음의 기작을 꿰둟어보는 마켓터들은 물건을 팔지만 꿈을 보여주고 환상을 꺼내어 놓는다. 그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자신이고 우리의 욕망이다.
세상일이 단순하게 먹고 자고 입는 일에서 디테일하고 복잡하게 산업과 분야가 발전하는 것은 이런 꿈들을 팔고 사는 행위 속에서 이루어질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늙고 나이가 들어서 대부분은 무엇을 사고 모으고 꿈을 꾸고 행복에 빠지는 일은 점점 줄어든다. 그 것이 거창하고 값비싼 것들이 아니어도 사라지는 것은 꿈의 상실이다. 자기자신에 대한 불확실성과 여백을 이미 채워버린 어른들은 포기나 외면으로 바뀌게 된다. 한정된 재화 돈은 나만을 위해 쓸수가 없다. 내가 벌었지만 내 돈이지만 가정을 이룬 부모들은 그 것을 누군가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젊은 이삼십대의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돈벌이를 자신에게 올인할 수 있는 행복한 시기이다. 결국은 그들 밖에 소비를 담당할 사람들은 없다.
독서모임이나 글을 쓰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삼십대의 여성이 아니면 50대이후의 중년들이다. 자신의 마음과 자신의 경제력을 자신에게 쓸 수 있는 사람들이다.
젊은 사람들 중 유독 여성이 많은 것은 세상의 벽을 일찍 알아버렸기에 채워질 수 없는 무엇이 그들은 스스로 자문하고 글을 쓰면서 위로받고 꿈을 키운다
중년들은 부모의 역할과 부부의 역할이 끝나가는 시점에 자신을 이제야 똑바로 바라보고 깨닫는다. 나만을 위한 것 나의 인생을 생각하고 잊었던 꿈을 다시 생각해낸다.
아무것도 안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꿈을 꾸지 않거나 그것보다 더 좋지 않은 징후들은 방치하는 마음이고 무시하는 마음일지 모르겠다.
굳즈를 사는 사람들, 피규어나 무엇인가를 모으는 오탁스런 사람들은 적어도 꿈을 꾸는 이들이다. 각각의 꿈들이 조금씩 세상을 다르게 물들이고 그렇게 나아가는게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