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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의 역습

by 승환

아날로그의 역습


아내와 함께 차를 타고 나설 때마다 우리는 늘 내비게이션을 켠다. 사실 나는 길을 제법 아는 편이 아니다. 머릿속의 도로와 지형은 대체로 개략적이고 추상적이다. 하지만 직접 가보고 나서 그곳의 공기와 분위기를 새기는 것을 좋아한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으니 길은 어디든 다 이어져 있어 설마 목적지를 못 찾을까 하는 자신감은 있지만, 변화무쌍한 개발의 열매들로 천지개벽한 것을 다 따라잡기는 어렵다. 그래도 나는 직관을 중시하는 편이라, 일일이 확인하고 기계의 도움을 받는 일이 번잡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아내는 다르다. 철저한 계획성과 불확실함을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그녀는 언제나 기계의 목소리를 따른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길이 아니면 불안해한다. 때로는 내가 더 빠르고 익숙한 길을 알아도 “네비가 알려준 길이 맞다”는 아내의 고집 앞에서 결국 나는 운전대를 잡은 채 기계의 지시를 따른다.


게다가 무료로 쓰라고 내놓은 네비가 순수한 인류애로 존재할 리 없다. 시간은 비슷해도 유료도로를 안내하는 꼼수를 부리는 것 같았다. 익숙한 길은 속도는 떨어져도 운전하기 편하고 수월했지만, 네비를 쓰면서부터는 새로운 루트를 학습하고 따라가야 했다.


사실 어떻게든 목적지에 도착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도 운전대를 잡은 이상, 내 의지가 아닌 누군가의 지시를 따른다는 사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방의 외길이 아닌 이상, 도착까지의 길은 수십 가지로 뻗어 있는데도 말이다.


내비게이션은 놀랍게도 길이 막히는 정도와 시간을 정확히 짚어낸다. 처음에는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갔다가, 예상보다 늦어지면 아내의 원망이 쏟아졌다. 결국 나도 이제는 기계의 음성을 켜고 달린다. 하지만 그 안내에 익숙해지자 도로의 풍경이나 주변의 모습을 즐기는 대신, 무미건조한 여성의 목소리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우회전을 놓치거나, 직진할지 좌회전을 할지 갈림길에서 망설이면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놓쳐도 다음 신호에서 하면 되는 일인데, 벌써 진땀이 난다. 길을 잃는 것은 단순한 착오가 아니라, 무능과 어리석음이 드러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경로를 이탈했습니다. 새로운 경로로 안내합니다”

기계의 한마디는 어떤 변명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때 아내가 “네비대로 안 가서 길을 잃었다”라고 한마디 던지면 더 견디기 힘들어진다.

순간 나는 모지리, 산만한 남자가 된다. 자부심에 금이 가고, 얼굴에 열이 차올라 에어컨을 켠다. 아내는 덥지도 않다며 조용히 스위치를 내린다. 편리를 위해 쓰는 기계가 어느새 나를 지시대로 움직이는 노예로 만들고 있었다.


그 순간 문득 깨닫는다. 요즘 사람들은 길을 헤매는 것조차 불편해하는 건 아닐까. 우연히 잘못 들어선 길에서 뜻밖의 풍경을 만나는 일, 예기치 못한 돌발 상황을 통해 길을 익히는 경험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편리함은 우리를 안심시키지만, 동시에 경험의 불확실성을 지워버린다.


도로와 도시, 마을의 연속성은 흐려지고, 경로와 경로 사이의 장소들은 무의미해진다. 긴 여정의 맛은 사라지고, 점과 점이 즉시 연결될 뿐이다.


경험은 이제 몸을 거치지 않는다. 우리는 직접 겪기 전에 이미 화면 속으로 그것을 다녀온다. 맛집을 찾는다고 치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식당인데도 사진과 평점, 수많은 리뷰를 보고 이미 맛을 짐작한다. 심지어 맛보기도 전에 만족하거나 실망한다.


사람마다 기호와 감성이 다르지만, 결국 다수의 의견과 평점을 따라간다. 좋은 장소를 알려주는 순기능이 있지만, 어느새 상업적 트릭이 스며든다. 서비스 음료나 작은 혜택을 대가로 가짜 후기를 부탁한다. 그 작은 뇌물 앞에서 사람들은 먹어보기도 전에 쉽게 좋은 평가를 남긴다. 블로거들의 협찬 글과 돈을 받은 광고성글들이 드러난 뒤로는 신뢰는 더 흔들린다. 그렇다고 다른 검색을 의지하면 악의적인 후기에 주저하게 된다. 결국 직접 경험은 사라지고, 시스템과 기술을 통한 간접적 경험만 남는다.


다양성은 원래 사람마다 천 가지 만 가지일 수 있지만, 이제는 한 방향으로 몰린다. 생활용품, 옷, 여행지, 먹거리까지 모두가 비슷해진다. 집단의 효율을 위해서 각자는 모두 비슷하게 먹고 자고 학습하고 자라난다. 개미들처럼 벌처럼 하나하나 개별의 힘은 점점 없어진다.


여행지도 다르지 않다. 다른 사람의 후기를 보고, 사진 속 풍경을 이미 익혀버린 탓에 막상 그곳에 도착하면 감흥이 옅어진다. 눈앞의 풍경보다 휴대폰 화면 속 이미지가 더 선명하다. 뜨거운 햇살, 불어오는 바람, 도시의 냄새 같은 몸의 기억은 사라지고, 타인의 경험을 빌려온 간접적 인상만 남는다.


이제 사람들은 기다림에 서툴다. 책과 영화보다 짧고 자극적인 쇼츠들에 익숙해져, 무언가를 위해 시간을 들이는 인내를 잃어버린다. 차 한 잔을 위해 반나절을 쓰던 이들의 미학을 부러워하면서도, 정작 따라 하지 못하는 것은 이미 패스트푸드 같은 생활 패턴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편리함은 우리에게 시간을 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경험을 앗아갔다. 자유를 준 듯 보이지만, 그 자유는 귀족의 자유와 닮았다. 인류가 모두 원하는 바 대로 된 것일까 전 인류가 왕과 같이 누리면 사는 꿈이 이루어진 듯하다. 몸을 움직이지 않고 세상을 경험하는 인간. 손끝 몇 번으로 음식을 주문하고, 공연을 보고, 타인의 삶을 구경한다. 지금도 수억수십억의 왕족들이 자신의 방에서 핸드폰의 영상을 보며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몸은 점점 불편을 잊고, 불편을 감당하는 힘을 잃는다.

풍요 속에 당뇨가 늘어난 것처럼, 마음에도 달콤하지만 끈적한 불순물이 쌓인다. SNS의 ‘좋아요’는 설탕과 같다. 순간의 쾌감을 주지만 결코 배부르지 않다. 관계의 무게를 대신하지도 못한다.


인간은 결국 관계 속에서만 살아남는다. 거미가 거미줄 위에서만 존재하듯, 우리는 서로 기대지 않으면 무너진다. 인터넷의 가상의 그물이 아닌 실재하는 몸이 비비고 매달릴 수 있는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그러나 관계는 디지털처럼 즉각적이지 않고, 효율적이지도 않다. 오해와 갈등을 동반하고, 기분을 맞추기 위해 시간을 들여야 한다. 불편을 견딜 때만 관계는 깊어진다. 아날로그적이라는 것은 바로 이 불편을 감수하는 힘이다.


표면적으로 현대인은 자주적이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속에서는 고립이 자라난다. 고생, 희생, 노고에 대한 두려움이 커져, 친구나 가족 관계에서조차 갈등이 생기면 회피하고 포기한다. 합리적이고 이익에 반하지 않는 길만이 옳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 합리성은 우리를 더 외롭게 만든다. 그래서 힘든 연애와 관계 대신 반려동물을 선택하고, 가상의 공간으로 숨어든다. 나의 필요보다 다수가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는 편이 안전하다고 믿는다.


인터넷 밈과 따라 하기는 그 단면이다. 기술은 끝없이 발전했지만, 사람들은 변수 앞에서 흔들린다. 종교는 쇠락하는 듯 보였지만, 오히려 소외된 이들을 끌어모은다. 관계의 안락을 그곳에서 찾는 사람들 중 일부는 쉽게 이용당하기도 한다. 오지의 여행과 익스트림 그리고 몸을 움직이는 운동들을 찾기 시작했다. 거리마다 건물의 이층에는 필라테스와 헬스장이 넘쳐난다. 무리를 지어서 거리를 뛰어다니는 러너들이 보인다. 사람들은 알려주지 않아도 몸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딱 먹고 살정도 벌기 위해 하루의 절반이상을 사용하고 남은 시간에 기술에 더 매몰되면 안 된다는 위험을 감지한다.

결국 다시 불편과 손이 많이 가는 비효율적 행위들이 선망의 대상이 되는 시대가 올 것이다.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있는 이들이 먼저 누리는 아날로그의 복귀다.


나는 그래서 결혼이야말로 아날로그의 결정체라 생각한다. 결혼은 효율의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생활습관과 작은 오해, 끝없는 타협과 화해. 불편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 불편을 포기하지 않고 지나칠 때 관계는 단단해진다. 결혼은 가장 비효율적이면서도 가장 깊은 경험이다. 오래된 필름카메라처럼, 결과물을 얻기까지 시간이 필요하고 실패도 겪는다. 그러나 그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진짜 빛과 색이 있다.


편리함은 우리에게 여유를 주었지만, 경험을 앗아갔다. 진짜 경험은 몸을 통과해야만 남는다. 손끝으로 스친 경험은 쉽게 잊히지만, 몸의 기억은 오래간다. 우리는 아날로그의 불편 속에서만 살아 있고, 관계의 무게 속에서만 행복할 수 있다.


‘아날로그의 역습’은 결국 인간다운 삶이 우리를 되찾으려는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몸으로 겪은 불편만이 진짜 기억을 만든다. 그리고 그 기억만이 우리를 인간답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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