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지 않는 여행

by 승환

속초나 동해 바닷가를 여행가게 되면 아직도 아버지 생각이 난다.

어린시절의 행복했던 몇 안되는 추억으로 옛 앨범처럼 기억을 자꾸 들추어지게 된다.


어린 시절 집안이 특별히 유복하지는 않았다.

경제적으로도 큰 어려움은 없어도 화목이라는 점에서 행복한 가정이라는 것에는 거리가 있는 집안이었다.

부모님 간의 트러블이 연속되었고 한 분의 일탈과 복귀 수없이 많은 날들 밤잠을 설치게 만들던 싸움들 고성들...

옆집에, 동네가 부끄럽다는 생각도 어는 샌가 더 하지 못하고 무덤덤히 받아들이고 그냥 하루에 일어나 밥을 먹고 학교를 가고 잠을 자는 것 같이 일상 속으로 들어와 받아들여진 모습이었다.

어린 나로서는 견디기 힘든 시절에 버티는 것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것, 침묵하는 것, 그냥 남의 일처럼 내 감정을 방관하며 지켜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나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형제들도 힘들게 자기 나름대로 피신처로 마음을 숨기고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리며 살아왔던 것 같다.

부모님들 역시 가해자이면서 스스로 피해자가 된 그 일상들이 버티기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 집에서 여행이야기를 하는게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 같지만 그래도 유년시절 여행을 많이 다녔다.

아버지는 집안의 트러블이 절정을 향해 달려갈 직전에 화목했던 기억들, 같이 추억하는 아름다웠던 것은 아마도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여름마다 캠핑을 갔던 일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아버지는 온 가족을 데리고 여행을 다니던 기억 속에서 소중했던 무엇인가를 느끼고 다시 찾으려 하였던 것 닐까?

나에게도 그 시절이 고생스럽기보단 년 중 행사처럼 일주일 또는 한 달 가까이 다녔던 캠핑의 추억이 아직도 오래 남아 있다.

그렇게 두 분이 싸우고 서로 증오하고 그러다가도 그 년 중의 행사에는 군말 없이 같이 하였다.

해수욕장을 그전에 가본 곳은 대천해수욕장과 경포대가 사진 속에 있지만 어린 시절이라 기억이 없다

초등학교 3학년 름에 가족과 같던 여행부터 나는 기억한다.

아마도 내가 내 배낭을 갔게 되었고 가족의 일원으로 먹어야 할 양식과 생필품을 등에 매고 나름 내 역할이 주어진 여행이서였을까 아니면 일주일정도 긴 여정을 처음 겪게 되어서 일지 모르겠다.

지금도 관광버스 이름이 기억이 난다. 대원고속관광, 에 아직 차가 없던 시절이었고 관광버스기사의 안내를 들으며 지금은 별 명소나 관광지도 아닌 설악 초입의 장소들을 일일이 소개하는 기사님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한계령 지도 않은 도로가 구불구불거리며 버스가 설악산을 넘어가면서 멀미라는 것을 첨 겪어 보기도 했고 불안하고 무언가 낯선 곳으로 향하는 게 두려워 아버지와 어머님의 모습을 힐긋 거리며 안도했던 기억도 있다.

그래도 새로산 텐트와 배낭들 튜브들 집에선 잘 먹지 않았던 길쭉한 수입햄 캔이라던지. 오징어 조개 고추장찌개 짭쪼름한 바다냄새, 성가신 모래알, 설악동입구의 맑은 계곡물 등등 기억하는 것 들 모두가 예쁜 추억이다.

그렇게 여헹을 다녀온후 다음해, 그 다음해 부모님은 사네 마네 싸우셨는데 그런데도 매 해 5,6년은 여행을 하였다.

다음 해는 중고로 자가용을 구해하셨고 그 좁은 현대 포니자동차에 가족들이 끼여 타며 여행을 다녔다.

한 해는 삼척을, 한 해는 화진포를 또 한 해는 또 다른 동해의 산속과 계곡의 어딘가를 피난민같이 떠돌며 다녔다.

처음 산 10인용 코오롱텐트는 자랑스러웠다가 점점 구중해지고 나도 형제들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가족여행은 한동안 더 이상 없었다.

경제걱으로도 아버지는 예전만큼 여유롭지 못했기도 했고 자식들은 부모와 다닌다는 여행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형제들이 다 큰 후에도 여전히 평화롭지는 않았다.

늘 싸우시다가도 화해의 제스처는 어디라도 다녀오시는 것이었다.

내가 군대를 가고 동생이 군대를 가면 면회를 다녀오는 것이 여행의 전부이자 끝이었다. 자식들과 어디를 가는 일은 점점 더 요원해진 일이되었다.

차로 갈 수 있는 만큼 적당한 구실도 있는 여행, 없는 생활비라도 쪼개서 자식을 보러 가는 게 아마도 낙이었지 않았을까?

누이가 시집을 가면 가까워도 한 번씩 외손주를 보러 가는 나들이 정도가 추가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곧이어서 아버지는 몸이 안 좋아지셨고 10여 년을 힘들게 버티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한동안 아버지를 모시고 살다 보면 아버지는 동해를 한 번씩 가자고 하셨다.

당신 몸은 이미 말을 듣지 않고 누군가가 일일이 모시고 다니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렇게 속초에 가서 그냥 바람이라도 쐬고 오면 기분이 좋아지시는 것 같았다. 예전의 어린 시절이야기는 매번 같은 내용이어도 처음 해주는 이야기처럼 열심히 이야기를 하시고 스스로 이야기에 취해 그렇게 차에서 주무시다마 깨다 긴 길을 같이 차로 다녔다.

나는 스스로 효자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모시고 다닐 때 트렁크에서 휠체어를 꺼내고 태워드리고 밀고 다닐 때 사람들이 말하는 칭찬이 그리 싫지가 않았는지, 동생이 결혼 후 거구의 아버지와 그렇게 둘이 여행을 종종 다녔다. 속초의 생선골목에서 나이 드신 주인 할머니는 아버지를 챙기는 모습이 좋아 보였는지 먹고 나오는데 붙잡고 밑반찬을 챙겨주신 적도 있었다.

사실 내가 마음이 선해서기보단 그저 아버지 성활 이길 수 없기에 맞춰드리는 상황인데 주변에서 너무 좋게만 보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여행을 다니면서 차 안에서 대화를 한 것이 어쩌면 아버지를 더 많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기도 했고 어린 시절에 어쨌든 내가 받았던 그런 것들에 대해 아버지에게 돌려드려야 한다는 생각도 많아지게 되었다.

돌아가시기 마지막 3개월 전에 동생네와 같이 간 여행을 끝으로 더 이상 아버지와의 여행도 영영 끝이었다.

우리 형제들을 두고 아버지 혼자 배낭을 메시고 길을 걸어가시는 듯 아마도 아버지는 혼자 여행을 가신 것 같았다.

우리 형제들 누구도 같이 할 수 없는 여행...

살아 있는 사람들은 언제든 여행을 끝내고 돌아갈 집이 있는데 아마도 아버지, 어머니는 돌아오시지 못할 것이다.


돌아오기 위하여 떠난다.

결국 다시 올 것을 기약하고 떠나는 것이다.

여행이라는 것을 그렇게 생각했다.

한 사람,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보면서 돌아오지 않은 여행을 생각하게 되었다.


아버지, 어머니와 같이 갔던 그 장소들 동해의 많은 바닷가들, 산들, 도로를 가끔 이제는 다른 사람과 가기도 한다.

도시가 되어버린 작은 어촌들과 이제는 다니지 않는 도로들 모든 게 다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지고 변해간다.

어린 시절 그렇게 여름마다 간 여행은 무엇으로 남았을까?

그렇게라도 하지 않음 아름다운 기억들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면 아련한 무엇 하나 남기지 않고 돌아오지 않을 혼자만의 여행을 가신다면 아마 발이 떨어지지 않으셨을지도 모르겠다.


내게도 그런 여행을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면 그렇게 많이 남지 않았다면 어떡하나 살짝 조바심도 난다.

나는 지금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남겨둬야 할까?

간직하고픈 그런 추억들과 순간들을 하나라도 더 남겨두어야 할 거 같다.

시간이 망각하지 않을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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