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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즐 Dec 20. 2021

어느 크리스마스 날의 포옹

#2015년_봄


  2015년 3월, 대학에 입학한 후 나는 모태솔로로서 연애라는 것을 정말 해보고 싶었다. 온갖 책들과 미디어들이 그리는 사랑의 찬양 이야기가 어떤 느낌인지 너무나 궁금했다. 연애도 사랑도 취미도 모두 공부에 유보당하던 10대 시절을 겪었기 때문일까, 대학교에 입학한 후 한없는 자유를 느끼며 얼른 나도 사랑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성소수자인 나로서, 자연스러운 만남 추구를 할 수 없었다. 주변에 호감가는 게이 느낌 오는 사람을 찔러보고 싶어도, 아닐 가능성도 많았다. 그래서 많은 성소수자들이 그러하듯, 데이트 어플리케이션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2015년에 21살이 되고 나서야 처음으로 게이들이 이용하는 데이트 어플리케이션을 사용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어플리케이션 속 일종의 문화규범(ex: 먼저 쪽지 보낸 사람이 먼저 사진 보여주기,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죄송하다 말하기(혹은 차단하기) 등)을 학습했다. 문화규범을 학습하고, 사람들과 연락하다가 첫번째 사람, 두번째 사람, 세번째 사람, 네번째 사람, ... 한 명씩 오프라인에서 만나게 되었다.


  2015년 봄, 당시 나와 만나게 된 내 또래 사람들은 보통 내게 술을 마시자고 말했다. 오잉? 첫 만남의 어색함을 풀고자 그러는 것인가 싶었다. 그래도 내가 술 찌질이는 아니니까 그러려니 하고 사람들을 만났다.


  하지만 당시 같이 술 마시자며 만났던 사람들은 대체로 술이 달아오를 때쯤 스킨십을 시도했다. 원나잇을 원해하시는 분도 계셨다. 나에게 호감있어하는 것은 감사하지만, 나의 호감 여부를 파악하지 않고 직진하는 것에 당황스러웠다. 혹은 이렇게 직진으로 나의 호감여부를 알아보고 싶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당시 모태솔로이자 슈퍼 유교보이였던 나는 내 마음도 잘 모르겠는데 상대방은 스킨십을 원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선을 긋고 하지 말라고 말하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 자리를 떠나곤 했다.


  이런 몇 번 술자리를 가진 뒤, 더 이상 어플 사람과 술자리를 갖지 않게 되었다. 그 뒤로는 나는 사람들에게 커피 한 잔 하자며, 카페에서 만나게 되었다.



#2015년_겨울


  이런 보수적이고 너무나 진지한 마음 때문일까, 2015년 연애 사업은 실패로 귀결되어가고 있었다. 무언가 괜찮아보이는 사람을 만나도 친구 이상의 호감을 느낄 수 없는 경우도 많았고, 내가 키가 크다보니 키가 작은 사람에게 호감을 못 느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러다 2015년 12월 25일, 나는 친구와 함께 메리 솔로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며 술로 슬픔을 달래려 하고 있었다. 친구는 이성애자 남성이었는데, 문득 남성 둘이서 크리스마스에 술마시는 것이 더 슬픈 일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친구는 약속을 파토냈다.


  나는 술에 목말라서 다른 친구를 찾다가, 문득 어플 사람 한 명 구해서 술마셔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플로 나보다 한 살 많은 어떤 형과 연락이 닿았고, 사진을 주고 받았다. 약간 사진 못찍는 분이 찍으신 것 같아서 이상하게 나오시긴 했는데 괜찮으신 것 같아 만나기로 했다. 우리는 서울 노원구에 위치한 석계역에서 만나 술 한 잔 하기로 했다. (어플남 본가가 석계 부근이셨다)


  그렇게 살짝 늦게 9시쯤 석계역에서 어플남을 만났다. 어플 형은 그냥 사진을 못찍는 훈남이셨다. 보고 살짝 놀랐다. 우리는 같이 석계역 부근 어느 한 술집에 들어갔다.


  술집에서 우리는 같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21살 대학 새내기였고(재수했다), 형은 22살인데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었다. 형은 자연과학 계열 전공이었고, 나는 사회과학 계열 전공이었다. 군대까지 다녀온 형은 나를 살짝 아무것도 모르는 햇병아리로 보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봐도 정말 햇병아리였다. 연애도, 군대도, 모텔도 겪은 적이 없으니..) 같이 대학교 이야기, 서울 생활 이야기, 이쪽 생활 이야기 등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리고 나는 연애사업을 위해 어플로 사람들을 올해 처음으로 만나기 시작했고, 술을 마시면 사람들이 대체로 들이대셔서 부담스러웠다고 말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인 오늘은 슬퍼서 마시기로 했다고 말했다. 형은 크게 웃었다.


  그렇게 대화를 꽃피우다가 시간가는 줄 몰랐다. 9시쯤 만났는데, 서로 너무 잘 통해서 시계는 12시를 넘어 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같이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다가 12시쯤 창문 밖에서 눈이 내렸다. 크리스마스에 잘 맞는 어플남을 만났는데 심지어 눈까지 내리니 상당히 로맨틱했다.


  2시쯤 술집 영업시간이 끝날 때가 다가오고, 우리는 술집을 나왔다. 그런데 당시 서울을 잘 모르던 나는 막차가 끊긴 줄도 몰랐다. 어떡하지 하다가 형은 길을 가르쳐주며 중간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말씀해주셨다. 그렇게 우리는 또 대화를 나누며 걸었다.


  형은 신이문역까지 데려다주었고, 여기서부터 쭉 가면 회기역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셨다. 나는 네이버지도를 보며 드디어 방향을 알게 되어 기뻤다. 그렇게 형과 신이문역에서 아쉬운 마음 반, 설레는 마음 반으로 헤어짐과 다음을 기약하는 대화들을 하게 되었다.


  빠이빠이 하며 대화를 마치고 서로 가려는 순간, 형은 갑자기 나에게 포옹을 해주었다. 눈 내리던 크리스마스 자정 날, 신이문에서 나는 포옹을 받았다. 나는 당황했다. 술 먹으면 사람들이 대체로 스킨십을 하려한 것과는 다르게, 누군가에게 포옹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팔, 다리, 엉덩이 만져대려는 것이 아니라 포옹을 하는 것. 형은 차별화 된 전략을 쓰시는 것 같았다. 처음 겪은 경험에 얼떨떨하고 설렜다.


  이것이 내가 겪은 2015년 크리스마스의 일이었다. 눈 오는 크리스마스 날 어플에서 만난 잘 맞는 훈훈한 형에게 포옹을 받은 일. 그 때 당황하며 느꼈던 형이 입은 코트의 재질이 아직도 생각난다.



#2021년_겨울


  2021년 겨울, 곧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이맘때쯤이면 항상 2015년 크리스마스의 기억이 떠오른다. 비록 그 형과 후일에 잘 되지는 않았지만, 마음 따뜻한 사람에게 포옹을 받은 것은 내 기억 속에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올해 크리스마스도 변함없이 솔로 크리스마스이다. 2015년 크리스마스 때도 솔로였고, 지금도 솔로지만 6년 간의 세월은 사람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했다. 많은 시행착오 끝에 연애도 했고, 군대도 다녀왔고, 어플 사람과 만났을 때 술을 마셔도 잘 처신할 수 있게 되었다. 순수하고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벌써 대학 졸업을 앞둔 경험이 축적된 사람이 되었다.


  비록 그 형에게 감정도 호감도 없지만, 크리스마스 때 쯤이면 항상 생각난다. 나에게 포옹을 해주었던 형은 잘 지낼지, 그 형도 6년을 겪고 많이 변했을지. 궁금해지긴 한다. 사람은 추억으로 살아간다는 말이 이런 것일까.


  눈 내리는 2021년 12월 겨울, 절대 잊을 수 없는 6년전 눈 내리던 크리스마스를 떠올리며. 모두 메리 미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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