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군복무 시절, 나는 군대 사람들이 전여친•여친 이야기를 할 때 너무 답답했다. 나는 나와 연애했던 동성 연인을 여성으로 치환하여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인지부조화 오는 기분이었다. 이루어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이 존재했다. 거기다 사람들이 여친의 생리 주기를 비롯해 여성의 신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이성애자인 척에 실패했다.
이 답답함은 휴가 때만 풀 수 있었다. 휴가 때 커밍아웃 한 지인들을 만나거나 퀴어친구들을 만나며 풀 수 있었다. 모두가 이성애자로 패씽되고, 커밍아웃시 어떤 불이익이 있을지 모르는 군대에서 나는 너무 답답했다.
그래도 상병 쯤이 된 이후, 전역 후에도 쭉 만나게 될 부처같은 성격의 친한 후임에게는 커밍아웃을 했다. 후임은 눈 커지고 바로 나에게 그러면 포르노는 그런거 보냐고 물어본 것이 기억난다. 나는 개빵터지며 그렇다고 말해주었다. 그 뒤로 나는 퀴어 이슈를 이야기나눌 친구가 생겨 답답함이 어느 정도 사라졌다. "뭐든 털어놓을 수 있는 자유"가 생기게 된 것이다.
2.
나는 대학 입학 후 퀴어 동아리에 들어가 퀴어친구들을 사귀었다. 또한 연애를 해보고 싶어 종종 게이 술집에서 열리는 모임에 참석해보기도 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친구가 되기도 했다.
스쳐지나갔거나 알고 지냈던 게이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참 박복한 이야기가 많았다.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정상"적인 삶을 살고 싶어 중학생 때부터 정신과를 내원한 사람, 게이인 자신을 부정하며 여성과 연애를 시도해본 사람들, 멀쩡히 잘 연애하다가 동성 연인이 집안의 압박으로 인해 갑자기 여성과 결혼해버렸다는 이야기 등.. 감정없는 사람과 일부러 연애•결혼한다는 사실은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가족•지인•선생님들이 성소수자 자체를 없다고 생각하고 + 자녀가 성소수자라고 커밍아웃하면 부정하는 사회적 분위기에다가 +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판치는 세상 속, 자신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그저 놀라며 들을 뿐이었다.
그 밖에도, 어떤 형과 게이 술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형은 진지하게 "나는 나 자신으로 살고 싶어서 서울로 왔다"라고 말씀하셨다. 갑작스러운 진지함에 1차로 놀라고 말의 내용에 2차로 놀랐다. 또한 벽장 속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가(= 퀴어들을 한번도 못보고 살아오다가) 퀴어동아리나 게이술집에 처음으로 발을 딛는 사람들도 보곤 했다. 다들 어색해하며, 긴장해하시다가 이내 잘 적응하고 자신이 살면서 힘겨웠던 점들을 털곤 하셨다. 다들 자신의 소수자성에 스트레스 받으며 "뭐든 털어놓을 수 있는 자유"가 그닥 없어보였다.
3.
애너매리 야고스가 지은 [퀴어이론 입문]을 읽다가 미국에서는 1951년에 남성 동성애자 중심 단체 <매타쉰 협회>가 설립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해당 단체의 한 참석자의 경우, "뭐든 털어놓을 수 있는 자유 ••• 정말, 바로 그것이었다. 우리는 긴장과 불신의 분위기 속에서 소속감과 동지애, 솔직함과 같은 감성을 찾아냈다"라고 말했다.
이 문구를 보자마자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 또한 한동안 "뭐든 털어놓을 수 잇는 자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1에서 언급했던 군복무 시절은 물론, 중고등학생 때도 마찬가지였다.
1950년대 미국은 흑백분리도 여전했던 시기이다. 60년대 제2기 페미니즘 운동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이다. 미국과 한국의 보수성을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나라 1930년대의 보수성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들었다. 미국 퀴어 영화를 보면 20세기에 종종 남성 동성애자 주인공이 야산에 생식기가 뽑힌 채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되곤 했던 장면을 보곤 했는데, 이를 통해 퀴어 단체 참석자들은 얼마나 힘겨운 분위기에 살았을까 생각든다.
동시에 나 또한 더 옛날에 태어났으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든다. 물론 지금도 퀴어로서 힘든 점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도 현재는 이렇게 개인 블로그에 말해도 살해당하지 않고, 비난받지도 않는 정도로 인권이 발전되었다. 세상의 발전을 느낀다. 블로그 게시글 중 퀴어 내용이 아닌, 페미니즘 관련 글에 좌표 찍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더 많은 편이다. (뭐든 피곤하다 - 근데 내가 남자라서 덜 달려드는 것 같다. 남자 premium인걸까?)
4.
베티 프리단은 주부로서 집밖에서 사회활동을 하지 않고 집안에서만 예속되어 아이를 키우고 가사일을 하며 나타나는 알지 못하는 답답함, 우울증을 "이름 붙일 수 없는 병"이라 명명하였다. 여성들 중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에의 여성성, 모성애로 인해 집안에 귀속되면서 알다가도 모를 우울감을 호소하는 것을 이름 붙일 수 없어서 결국 "이름 붙일 수 없는 병"이라 이름 붙인 것이라 한다.
여성철학 시간에 "이름 붙일 수 없는 병"을 처음 배웠을 때, 언어의 위대함을 느꼈다. 언어로 개념화를 통해 해당 개념을 존재하게 만들었다. 여성들이 겪는 개념을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와 비슷하게, 오늘 책을 읽다가 마주친 "뭐든 털어놓을 수 있는 자유" 또한 신선하게 다가왔다. 성소수자들은 누구나 이 자유의 결핍을 느낀다고 생각한다. 단지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이 결핍을 풀어나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뭐든 털어놓을 수 있는 자유"라는 말을 곱씹어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