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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즐 Jan 04. 2022

자기소개서에 성소수자라고 기입하기

#거짓말


  나는 거짓말을 잘 하지 못한다. 표정 관리도 잘 못하는 성격이다. 하지만 성소수자인 나에게 세상은 거짓말을 요구했다. 10대 때 여자애들 얘기가 나오면 공감하는 척을 해야했고, 군대에서 연애 얘기가 나오면 사귀었던 남성을 여성으로 둔갑시켜 말해야 했다. 거짓말을 잘 못하다보니 나의 공감하는 척도, 연애 얘기도 모두 어색해보였다. 주변에 눈치빠른 사람들은 눈치를 채는 듯 했다.


  나는 더 이상 이렇게 나 자신에게 거짓되게 살고 싶지 않았다. 세상이 변해가고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나 자신이 나답게 살아가고 싶었다. 따라서 성인이 된 이후, 주변에 조금 친해졌다 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커밍아웃을 했다. 정리할 관계는 정리했다. 또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다가 누구나 일할 수 있는 보수적인 공직사회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내가 잘 할 수 있는 사회적 소수자의 인권 및 복지 쪽을 위해 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기소개서


  대학원 입시에서 떨어진 이후, 일단은 독립을 하고 관련 경험•경력을 쌓아보기 위해 자기소개서들을 쓰고 있다. 장애인•이주노동자 등 사회적 소수자 권익 향상을 위해 일하는 비영리사단법인 ngo, 인권단체 등에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고 있다.


  대학원 준비한답시고 전공공부에 매몰되어 경력이나 경험이 하나도 없을 줄 알았는데, 은근히 한 것들이 많았다. 군대에서 한 인권 관련 활동, 시각장애인 자원봉사활동, 이주노동자 친구 관련 버디 활동 등 적지 않은 활동들을 마치 운명인 것처럼 해왔었다. 이렇게 스펙으로 쓰려고 한 것이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돕고자 하는 의도로 했던 것인데.. 이렇게 자기소개서에 녹이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자기소개서에 지원동기를 쓸 때마다 항상 내가 성소수자임을 기입해야하는지 기로에 서게 된다. 내가 사회적 소수자의 권익을 위해 일 하고 싶은 이유를 구체적으로 적는 가운데,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나의 성정체성이다. 나 또한 소수자 스트레스가 어떤 것인지 너무나 잘 알기에, 나는 제도적으로 정서적으로 비시민 취급받는 장애인 분들과 이주노동자 분들께 자주 감정이입하게 되고 봉사활동을 하곤 했다. 만약 자기소개서에 나의 성정체성 이야기를 뺀다면, 다소 진실성이 떨어져보이게 된다. 그리고 마치 김밥에서 단무지 우엉 시금치 계란 빼고 김+밥+당근만 남는 느낌이 되어버린다.


  NGO 분야 에디터 직종에 지원하는 경우에서도, 내가 글을 써 본 경험으로 동아리 활동을 한 것만 쓸지, 블로그와 브런치를 운영한다는 것을 말해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후자의 경우, 자연스럽게 커밍아웃을 해야하는 것이며 해당 조직이 성소수자에 포용적인지 주판을 튕겨보아야한다.



#성소수자


  사회적 소수자들을 향한 혐오발언들을 관찰하다보면, 성소수자에의 혐오발언들은 다소 다른 어감을 지닌다. 여성, 장애인, 이주노동자들에의 혐오발언과 달리, 성소수자에의 혐오발언에는 거부감과 더럽다는 뉘앙스가 포함되어있다. 우리나라가 성 관련해서 (겉으로는) 상당히 보수적인 문화권이어서 그런걸까, 다른 성적지향성•성정체성에 거부감과 더럽다는 프레임을 투여한다. (정조의 의무를 덜 한 여성을 향해 '걸레'라고 지칭하는 것의 상위호환 같으면서도, 다른 맥락인 것 같기도 하다) 조선시대 음양론의 유산인가 싶기도 하다.


  따라서 무언가 다른 사회적 소수자 집단들에 비해 커밍아웃에 문화적 압박이 존재하는 것인가 의문짓게 된다. 누군가 자기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점, 누군가 자기 자신이 이주노동자라는 점을 당당히 밝히는 것을 자주 봐왔고, 그 분들은 겉모습으로도 종종 식별된다. 하지만 성소수자라는 집단은 자신히 밝히지 않으면 드러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밝히는 즉시 자신에게 거부감과 더러움이라는 프레임이 투사될 수 있어서 그런지 당당히 밝히는 것을 자주 봐오진 못해왔다.


  따라서 내가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내가 성소수자라는 이야기를 써야할 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비록 NGO, 인권, 복지 분야라 할지라도 한국 사회가 대체로 퀴어프렌들리 한 편이 아니다. 또한 어느 분야든 나이있으신 어른 분들은 퀴어가 상당히 생소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곤 했다.


  나에게 더러움이 투사되는 건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더럽게 생각하든 말든 그쪽 사정이고 그쪽이 사고가 좁은 거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문제는 채용이다. 성소수자임을 직간접적으로 밝히지 않으면 나의 지원동기의 진실성과 경력이 줄어든다. 성소수자임을 밝히면 진실성과 경력이 채워지는 대신 내가 적합한 인재일지라도 나의 채용여부가 지원한 단체의 인권감수성에 달려있게 된다.



  어렵다. 짜증난다. 나 자신이 나답게 살아가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것일까. 이렇게 고민해야하고, 이렇게 스트레스 받아야 하는 일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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