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경쟁을 싫어했다. 모의고사를 보면 친구들은 서로 틀린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점수를 공유했다. 나는 모의고사를 볼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았다. 원하는 성적이 나오지 않는 경우도 그렇고, 나보다 공부를 안하는 친구가 나보다 점수가 높을 때 좀 많이 짜증났다.
그러다가 나는 모의고사를 보고 친구들과 이야기 나누지 않았다. 나는 모의고사 보는 날이면 도망다녔다. 비교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았고 점수 순으로 서열화되고 싶지 않았다. 서열화되어 등급을 받아도 다른 친구들과 비교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나는 모의고사가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간주하기 시작했다. 내가 노력해서 내가 원하는 원점수와 등급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21세기 현대 한국 사회의 10대 학생으로서.. 나 스스로 성과를 내는 주체로 간주하고 나 자신을 착취.. 하며 공부했다. 비록 상대평가이고 4%이내 1등급을 신성화 하는 시스템이었지만, 남과 비교하지 않고•경쟁하지 않는 느낌이 아니라 어느 정도 숨통이 트였다.
그렇게 공부를 하고 대학에 왔다. 그런데 대학교 수업들도 모두 상대평가였다. 같이 듣는 친구들을 경쟁자로 만드는 시스템이라니... 너무 짜증났다. 대학생 때도 나는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만큼만 공부를 했다. 그렇게 재미없던 수업은 성적이 낮았고 재미있던 수업은 성적이 높았다.
대외활동의 경우도 재밌어 보이는 것들을 했다. 남들이 취직하려면 꼭 해야한다고 말하는 인기 대외활동은 하지 않았다. 내 기준은 취직이 아니었다. 오직 재미였다. 인기 대외활동은 경쟁률이 수십 대 1이었다. 비인기는 높아 보았자 10 대 1이었다. 나는 사람들과 박터지게 경쟁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노력하고 싶지도 않고, 그렇게 노력하면 너무나 피곤했다. (그리고 내가 재미있어하는 것들을 쭉 따라가다 보면 어쩌다 우연찮게 좋은 기회들을 얻기도 했다.)
졸업반이 되고 나서는 취준하는 친구들을 옆에서 보았다. 적게는 30:1, 보통 50:1, 100:1, 심한 것은 400:1 경쟁을 뚫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이 모습이 너무 비이성적으로 보였다. 물론 친구들이 잘 뚫으면 좋겠지만, 저기서 탈락한 29, 49, 99, 399명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내 친구들이야 엘리트들이라서 결국 시간이 지나고 다들 잘 되었지만, 끝내 잘 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인기 직종의 경쟁률만 보아도 현기증이 났다. 재미없어 보이기도 했고 내가 원하는 직종이 없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높은 경쟁률을 뚫고 고연봉 고복지의 인기 직장을 갖지는 않았고, 그렇게 인기있지는 않지만 재미있고 좋은 직장에 재밌게 다니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이 사회 속 무한경쟁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고,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고등학생 때는 상대평가와 비교로부터 도망다녔고, 대학생 때는 인기•경쟁보다는 재미있는 것들 위주의 활동을 했고, 현재 직장도 박봉이지만 재미있는 곳을 왔다. 누가 보면 나약하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무한경쟁 속에 가루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10대 때 이미 번아웃이 온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외국인 친구와 대화를 하다가 충격적인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유럽권 출신의 외국인 친구는 캐나다를 여행다녀오고 캐나다 썰을 풀어줬다. 캐나다에서 가게가 깔끔하고 커피가 맛있는 카페를 갔는데, 한국인 사장이 하는 카페였다고 한다. 한국인 사장들이 하는 카페는 모두 가게가 깔끔하고 커피가 맛있다고 한다. 친구가 있었던 지역의 경우, 사람들은 한국인 운영 카페를 주로 가고 다른 가게들은 쨉이 안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친구는 한국에서 한국 가게들은 모두 다른 가게들과 경쟁하면서 깔끔하고, 맛있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편인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 경쟁의 결과로 한국 가게들은 국제 수준에서 최상급 같다고 말해주었다. 친구는 한국에서 위생이 별로고 맛이 없으면 폐점하는 편이 아니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친구의 말에 끄덕이면서 온몸에 전율이 돋았다. 맞다. 친구의 말대로 우리는 맛집들을 좋아하고 맛없는 식당들은 잘 가지 않는다. 사람들은 맛없는 식당•불친절한 식당에 별점을 테러하기도 한다. 프랜차이즈 가게들도 그렇고 개인 가게들도 그렇고 신제품을 마케팅하든지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지 등 끊임없이 노력하고 경쟁한다. 경쟁에서 도태되는 경우, 문을 닫는다.
나는 경쟁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현실의 나는 경쟁하는 가게들의 서비스를 소비하며 경쟁 위에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나는 벗어나고 싶어도 사회적으로 얽혀들어가 있었다. 마치 프린터에 걸린 A4용지처럼 나는 벗어나고 싶어도 얽혀있었다. 국내 경쟁의 결과로 국제사회 눈높이에서는 아주 수준 높은 서비스를 아주 즐겁게 향유하고 있었다. 가게 뿐만이 아니다. K-pop도, 한국 영화도, 유튜브 영상들도, 지금 쓰고 있는 스마트폰도.. 모두 경쟁의 부산물로 만들어진 고품질 작품이었다.
외국인 친구와 대화하며 나는 깨달았다.나는 경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경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경쟁 속에서 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