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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즐 Oct 31. 2023

나의 예민함을 사랑해보기

  나는 예민한 사람이다.

  어렸을 때 나는 나의 예민함이 내가 성소수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이성과 어울리기 어려워하는 이성애자들이 있듯이 나 또한 동성과 어울리기 어려워하는 동성애자라고 생각했다. 청소년 시절에 친구들로부터 가벼운 장난을 받아도 상처받곤 했는데 이 또한 내가 섬세한 게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대학생이 되고 나와 같은 성소수자 사람들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면서 내가 문제지 성정체성이 문제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 깨달았다.

  내 주변 성소수자 친구들은 포용적이고 털털한 반면 왜 나는 예민한 성소수자로 자란 걸까?

  내가 문제인 것은 아닐까?

  이것이 바로 성인기 첫 시작 때 내가 처음으로 가진 의문의 시작이었다.


  직장인이 된 뒤로 회사 대표가 나에게 화를 내는 경우가 더럿 있었다.

  전직장 대표는 내 기준으로는 얼토당토 아닌 일을 나에게 뒤집어씌우며 나에게 고함을 치고 화를 냈다.

  나는 그날 하루 종일 마음이 황폐화되었다.

  퇴근 후에도 직장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으나 자꾸 계속 떠올라 마음이 괴로웠다.

  나는 궁금했다. 왜 나는 누가 화를 내면 마음이 황폐화되고 계속해서 생각나는 거지?

  문득 부처같았던 군대 후임이 떠올랐다.

  군대에서 어떤 후임은 선임이 화를 내도 업무적으로만 고친 뒤 그냥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는 마음이 황폐화되고 군대 후임은 마음이 평정심을 유지하게 되는 계기가 무엇일까?


  고민 끝에 문득 내가 아동·청소년기 때 가정 및 학교에서 화를 무척 당하고 부들부들 떨고 내면이 황폐화되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아 나는 화와 모난 것들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예민하게 자랐던 거구나' 깨달았다.

  성인이 된 후로는 여러 가지 활동들을 하며 열심히 나를 세상에 던져서 예민함도 소심함도 많이 줄어들었고 오히려 적극적인 성격으로 변했다.

  하지만 화를 내는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마음, 모난 사람들로부터 느끼는 거부감, 차별적이고 서열적인 사람들로부터 느끼는 윤리적인 거부감 등 예민함이 아직 남아있는 편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예민함을 극복하고자 용을 썼다.

  불교 경전을 공부할 때 불교에서 말하는 알아차리기 연습, 일체유심조도 열심히 적용했다.

  천주교 신자로서 기도도 열심히 했다.


  하지만 한계가 너무나 명확히 보였다.

  몸이 마치 아동·청소년기 때 이미 학습된 본능적인 결과물을 넘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최근에 교육봉사 하는 곳에서 '아동학대' 관련 교육을 들으러 간 일이 있었다.

  아동학대 강사님께서는 이런저런 내용을 가르쳐주시면서 "아동학대를 10년 동안 당했던 아동은 회복하려면 10x10, 100년이 걸린다는 말이 있다"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강사님의 말을 듣고 좀 크게 깨달았다.

  비록 내가 겪은 아동·청소년기가 아동학대, 가정폭력 범주에 들어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 나의 예민함은 적어도 30년 이상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의를 들은 뒤부터 나는 나의 예민함을 '극복 대상'이 아니라

  인정하고 포용하고 사랑할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아 나는 천성적일 수도 있지만 가정 및 학교에서 겪은 일들로 예민한 성향이 생겼고, 모난 사람들에 거부감이 있으며 비윤리적인 사람들을 보면 도망치고 싶구나'

  '앞으로 직장생활 혹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런 사람을 마주치면 무척 스트레스 받겠지만 그것은 내가 예민함으로부터 나오는 스트레스이지, 인생 살면서 상대방도 저럴 수도 있고 나도 이럴 수도 있는 법이겠구나 생각하며 넘어가야겠구나'

  '만약 맞지 않는 사람과 상호교류하며 참거나 넘기려 하다가 불가능하다고 느끼고 나의 예민함이 극에 달하면 그냥 불편하고 조심해 달라라고 말해야겠구나'

  '불교 경전 공부할 때 수행법도 그렇고 천주교 기도도 그렇고 종교의 힘은 지속적으로 빌려야겠구나'

  이렇게 생각이 정리되었다.


  그렇게 나는 또 한 번 나의 한 부분을 자기객관화 하고 성장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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