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일알바하며 주택청약 이야기를 나누다가
백수가 된 뒤로 이곳저곳에서 일일알바를 하고 있다. (새롭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재밌고 신선한 기분이다)
며칠 전에 알바들이 다같이 사무실에 앉아서 소품을 상자에 넣는 일을 했다.
우리 테이블에는 4명이 앉아서 일을 했다.
30대 초반 남성 분도 계셨고, 40대 여성 분도 계셨고, 20대 대학생도 있었다.
이래저래 일을 하다가 다른 분들은 잠깐 다른 곳으로 불려가고
나는 30대 남성 분과 둘이서 대화를 하게 되었다.
대화를 하다가 일일알바에 주택담보대출 빚 갚으러 투잡 쓰리잡 뛰는 남성 분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나는 말만 들어도 피곤했다. 그놈의 부동산, 그놈의 주택담보대출, 그놈의 아파트, 그놈의...
30대 형님께서는 주택청약 당첨되고 주택 영끌해서 구매하고 빚 갚으러 알바하는 분들 이야기를 엄청엄청 했다. 나도 흥미로워서 질문 몇 개 던지니 형님은 또 이래저래 엄청엄청 이야기 해주셨다. 견문이 넓어지는 기분인 동시에 피곤했다.
나는 30대 형님께 '주택청약 당첨되면 형께서도 투잡 쓰리잡 뛰실 수 있냐, 나는 너무 힘들 것 같다'라고 물어보았다.
형께서는 고개를 끄덕이시며 또 일장연설을 해주셨다.
피곤했다. (형 말에 피곤한게 아니라 사회적 현실에 피곤했다.)
나는 그렇게 못하겠고, 경기도 오래된 낡고 저렴한 아파트에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형은 "그걸 괜찮아하는 여자를 만나면 괜찮겠네요"라고 말했다.
어... 나는 벙 쪘다.
형 분께서는 또 이래저래 얘기를 이어나갔으나 나는 이미 해당 발언과 다른 발언들에 멘탈이 나간 상태였다.
불편했다.
1. 내가 당연히 이성애자라고 가정하고 이루어지는 발언들도
2. 이성애 여성은 '낡고 허름한 아파트'보다 '주택청약으로 새롭게 지어진 주택을 선호할 것이며 그런 남성을 원할 것이다'라고 가정하는 발언들도
3. 이성애자들의 결혼시장에서 이성애 남성이 혼수로 집을 마련해야한다는 문화적 관습이 남아있는 상황도
4. 이성애 남성들이 부담을 느껴하고 있고 남성의 경제적 부담이 종종 여성혐오로 표출되고 있고 이를 타개할 방책은 성평등 정책과 페미니즘인데 한국 사회는 이런 논의가 무너진 것 같은 사회적 현실도
5. 사람들은 '낡고 허름한 주택'보다 '주택청약을 통해 새롭게 지어진 아파트/주택'을 선호하고 있으며 후자를 소유함과 동시에 무언의 구별짓기로 계급화를 이루려고 한다는 듯한 느낌도
등등... 또 나의 예민함이 폭발해 불편하게 되었다.
내 예민함이 폭발하게 된 것은 형의 발언들이 1차적 이유겠지만
형의 발언 뒤에 있는 사회적 현실과 문화적 관성과 여성혐오적 맥락이 본질적인 이유였다.
형 얘기를 듣는 도중 나는 대화가 불편하고 끊고 싶어서
"저는 이성애자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네요."라고 던져드렸다.
형께서는 잠시 멈칫 하다가 또 다른 이야기로 건너갔다.
그렇게 또 하루도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