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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즐 Nov 16. 2024

부질없는 부지런함에 슬픔을 술로 풀며

사랑 찾아 삼만리

  며칠 전, 밤 10시에 남자를 만나기로 했다. 데이트 어플리케이션으로 대화를 나눴던 남자였다. 어플에서 사진 속 남성 분은 내 스타일이었다. 문학적 감수성도 있어보이고 훈흔하고 살짝 남성적인 느낌. 남성 분이 매일 9시에 퇴근하고 바쁘셔서 매번 일정이 맞지 않아 어플을 넘어 오프라인에서 만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다 밤 10시에라도 만나서 함께 카페를 가거나 산책을 하기로 일정을 잡았던 터였다.


  그 날 나는 퇴근 후 온라인 멘토링을 해야하는 날이었다. 대학생 때부터 하고 있던 청소년 대상 영어 멘토링을 퇴근 후 온라인으로 하는 날이었다. 내가 멘토링을 마무리하면 9시 30분이 된다. 그때 출발하면 아마 10시쯤 약속장소에 만날 수 있었다.


  약속 당일, 나는 회사에서 8시간의 노동을 마치고 터벅터벅 집에 돌아왔다. 샤워를 마치고 간단히 저녁을 먹었다. 중학생에게 2시간 가량 영어를 가르쳤다. 10번 넘게 가르친 내용을 또 기억 못해서 터덜터덜 기운을 빼앗기며 수업을 했다.


  힘겹게 수업을 마치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전철을 탔다. 밤 10시쯤 서울 지하철 2호선이 이렇게 사람이 많이 붐비는지 처음 깨달으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사진 속 모습도 내 스타일이고 메세지로 대화를 나누어보니 괜찮았어서 기대가 되었다.


  그렇게 약속장소에서 남성과 만났다.

  남성은 사진과 다른 모습이었다. 사진에 비해 살이 많았고, 여성적이었다.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나는 보통 어플에서 사람을 만날 때 사진과 달리 내 스타일이 아니어도 함께 대화를 나누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매력을 발견할 수도 있고, 만나기로 했는데 얼굴 보자마자 내 스타일이 아니라 끝내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을 한다. 대화 후 매력을 못 느끼면, 좋은 사람 만나라고 말하면 되고.


  하지만 이 날은 정말 스트레스가 솓구쳤다.

  사진과 너무 다르고, 그쪽이 너무 바쁘다고 해서 밤 10시에 나와줬는데,

  회사에서 일하고, 멘토링까지 해서 에너지가 없는데,

  대화를 나눈다고 달라질 것이 과연 있을까? 이전에도 사진 가짜인 사람들과 카페에서 대화해서 얻은 것은 없는 듯한데? 밤 10시인데 기대 없는 대화를 나눠?


  남성 분은 내 표정에서 생각을 읽었는 듯 했다.

  "많이 피곤해보이시네요"라고 말했고,

  대화가 이어지지 않자 잠시 뜸을 들이더니, "피곤하시니 집에 들어갈까요?"라고 내게 먼저 말했다.


  나는 속으로 기뻤다.

  남성 분과 같이 먹으려고 귤 2개 가져왔었는데, 하나 드시라고 드리고 슝 떠났다.


  현타가 너무 심하게 와서 집 가는 길에 바로 친구한테 전화했다.

  친구는 퇴근하고 멘토링하고 남자보러 집에서 그 멀리까지 갔냐고 참 부지런하다고 감탄했다.

  나는 부질없는 부지런함에 차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나도 이제 30대인데 나는 혼자 살게 되려나...


  집에 가는 길에 충격이 조금 심했서 멘탈이 털렸다.

  기대하는 마음이 컸던 듯 했다.

  집 앞 편의점에서 술 못 먹지만 과일맥주를 사서 갔다.

  슬픔을 술 품으로 달래며 충격을 잊으려 노력했다.


  플라톤의 <향연>에 따르면 본래 인간의 팔은 네 개, 다리는 네 개, 머리는 두 개였다. 인간이 너무 강하고 신에게도 대들어서 신은 인간을 나누어 팔 두 개, 다리 두 개, 머리 한 개로 만들었다. 그렇게 자신의 반쪽을 찾으러 나가는 여정을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언제쯤 팔이 네 개, 다리가 네 개, 머리가 두 개가 될 수 있을까?

  일종의 존재론적 위기를 느끼게 되는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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