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 분단, 성소수자, 탈북자
최근에 늘 바쁜 개인싸 생물학적 여성 친구가 갑자기 영화를 보자고 제안해왔다. 개바빠서 1년에 한 번 영접할 수 있을까 하는 친구인데 급 영화 만남이라고? 친구가 영화를 사랑하는 친구이긴 했다. 놀래서 자초지총 들어보니 최근에 게이 영화 <3670>이 개봉해서 함께 보러가자는 얘기였다. 개바쁜 인싸님의 간택에 몸둘 바를 몰라 황송해하며 함께 종로에 있는 CGV 피카디리1958로 영화 <3670>을 보러 슝~~ 갔다.
근데... 영화관 대기실에서 남성의 90%가 게이같았다. 김똘똘과 홍석천 같은 사람이 한 트럭이었다. 개인적으로 돌고래 같은 음성을 남발하는 게이 분들께 기빨려하는 편인데, 영화 대기실에서 내 기가 승천하는 기분이었다. 친구와 함께 영화관을 들어갔을 때도, 왼쪽과 오른쪽, 뒤쪽 모두 남성의 목젖에서 돌고래 음향이 동시에 발산되어 기가 쪽쪽 빨렸다. 그만큼 게이들에게 유명한 영화였던 것 같았다. (나 또한 최근에 트위터에서 몇 번 후기를 보긴 했어서 궁금했던 영화이기도 했다.)
#영화_내용(일부 스포)
영화를 보는데 게이 데이팅 문화, 모임 문화 이야기가 너무 사실적으로 나왔다. 원나잇, 술번개(데이트 상대 찾으러 오는 게이들의 술모임), 게이 친목 모임(동갑 모임이나 취미 모임 등) 등이 나오는데 너무 내가 겪었던 얘기같았다. 영화에 나오는 게이 배우 분들 중 몇몇 분들도 진짜 너무 현실적인 게이 같았고, ... (질척거리는 역할을 하신 분 진짜 극사실주의였음) 그냥 내가 아닌 또다른 게이들의 이야기처럼 현실적으로 영화를 시청했다.
그런데 탈북자이자 게이인 주인공 철준의 이야기가 나올 때는 철준의 삶의 무게에 압도되었다. 철준은 탈북자이자 게이이고 게이 세계에서도 소수자이다. 한국 게이들과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살아왔고, 언어가 같다고 한들 소외감을 느낀다. 남한 게이들은 남한에서 공통 국민교육과정을 이수했고 같은 미디어 프로그램들을 보며 공동의 공감대 이슈들이 있다. 하지만 철준은 비록 게이 세계에서 비현실적으로 잘생겼다 한들, 사람들과의 교집합이 이미 좁았기에 처음에 다가가기 어려워한다. 설상가상으로 게이 커뮤니티 내에서 만남과 떠남이 항상 반복되고 상처받는 경험들이 있는 편이라 남한 게이들이 마음의 문을 잘 열지 못하는 장면들도 나온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노는 것 마냥 느껴지며 공감이 갔다. 그렇게 무게감 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나 또한 러시아로 교환학생을 가서 유럽 백인놈들 사이에서 소수자로 살아갔던 경험이 있었기에(개힘들었음) 철준의 마음을 아주 살짝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철준과 탈북자들의 서사가 나올 때는 차마 공감하지 못하고 삶의 무게에 압도되어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철준이 그렇게 종로와 이태원에서 게이들과 신나게 노는 모습은 여타 다른 게이들과 크게 다를 것 없었다. 하지만 철준이 밤에 집에 돌아와서 원룸에서 구글맵을 켜고 북한 고향집을 찾아보는 모습, 철준과 탈북자들이 자신의 부모님을 탈북시키기 위해 n천만원을 구하는 모습, 정부 및 교회 사람들이 탈북자들의 원활한 남한 정착을 위해 돕는 모습들... 모두 내가 겪어보지 못했던 이야기들이라 나를 압도했다. 탈북자 관련 내용들은 뉴스에서 텍스트로 접하거나, 탈북자 강사님을 통해서 구두언어 및 세미나를 통해 접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를 영화로 접하니 탈북자 분들의 삶의 무게가 구구절절 느껴졌다.
특히나 철준은 언뜻 보면 게이 커뮤니티 모임에 종종 나와서 노는 one of 게이일 뿐이다. 한국 사회 내 성소수자로서 게이 문화를 즐기는 한 명의 게이일 뿐이다. 그런데 영화 상에서 철준이 집에 가서 게이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나 탈북자라는 정체성을 보이는 순간, 나는 그의 삶의 무게에 강력히 압도되었다. 나와 평범하게 놀던 게이 친구가 저런 삶을 겪는다면, 나는 옆에서 존재자체로 감정적으로 너무 힘들 것 같았고 차마 도움이 되는 친구도 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단지 옆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다른 게이 친구 대하듯 평범하게 대하려고 노력할 것 같았다.
특히 철준이 밤에 이불속에서 휴대폰으로 구글맵을 켜고 청진역 옆 자기 집을 찾아보는 모습도 정말 너무 충격적이었다. 머리를 망치로 맞은 느낌이었다. '아, 누군가에게 고향이란 자유롭게 갈 수 없는 공간이구나'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고, 실향민을 위해서라도 통일까지는 아니더라도 남북교류라도 활발히 진행은 되어야겠구나... 하는 점을 뼈저리게 느꼈다.
영화를 마치고 집에 와서 나 또한 태어나서 처음으로 구글맵에서 북한을 찾아봤다. 철준이 봤던 청진역 옆 주택단지를 살펴봤다. 주택단지가... 굉장히 낡은 느낌이었다. 교과서에서 봤던 우리나라 1960~70년대 느낌이 살짝 들던데... 북한 사람들은 잘 지내고 있는지 참 안타까웠다. 아니 북한이 경제적으로는 어렵게 되었다고 하지만, 핵무기 개발이나 해대고 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잘 일하고 있는 거야? (동독 무너지고 공산권 무너질 때 북한도 좀 남한이랑 잘 좀 통일하지 그랬어 빌어먹을 북한 고위급들아...)
#느낀점
한국 내 게이 문화, 탈북자 서사는 대중적으로 유명하지는 않은 소수자의 내용이다. 이를 영화화하여 가시화했다는 점에서 좋다고 느꼈다.
미시적으로 볼 때 철준이라는 개인이 탈북한 게이로서 남한 내 게이 문화를 즐기는 모습은 내 입장에서 볼 땐 평범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탈북자의 삶이 비치고 분단국가라는 거시적인 현실이 등장하며 내 머리를 세게 때린 느낌이었다.
작중 로맨스 이야기는 스토리적으로 재밌긴 했다. 그러나 최근에 대도시의 사랑법 규호-영이 순수한 사랑 이야기가 너무 아직도 내 마음속에 차지하고 있어서인지 대도시의 사랑법을 물리치진 못했다...
그래도 작년에는 대도시의 사랑법이 히트였고, 올해는 3670이 나오며 매년 좋은 게이영화들이 나와서 너무 기쁘다. 빨리 이 김에 한국 사회도 성소수자 친화적 사회로 잘 바뀌고, 우리 사회도 포용적인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게이뿐만 아니라 다른 성소수자 영화도 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긴 한데 요즘 게이 콘텐츠도 다 판타지에 젖은 이성애자 여성들의 수요들 때문에 만들어지는 건가 싶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