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을 출발한 모스크바 행 비행기는 9시간 남짓 지나 발음하기도 어려운 '세레메티예보' 국제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해외 출장 경험이 많아 어느 나라를 가던지 입국 수속 대기줄에서 기다리지 않으려고 비행기가 착륙해서 멈춰서면 신속하게 일어나 짐을 챙겨, 최대한 빨리 비행기를 빠져나와 종종 걸음으로 입국수속 하는 곳으로 가는 습관이 있다. 모스크바 세레메티예보 공항에 착륙해서도 습관적으로 몸이 반응, 나름대로 속도를 내어 일번으로 여권을 내밀겠다는 신념하에 모든 사람들을 제치고 Passport Control에 도착했건만, 서두른 보람이 없다. 이미 먼저 도착한 무리들과 그 무리들보다 앞에 도착한 비행기에서 모여들기 시작한 무리들이 차곡차곡 밀려 있어 수속대기실은 아수라장이다.
보아하니 입국 수속이 하세월이다. 후진국에서 많이 보던 익숙한 진풍경이다. 입국 수속을 하려는 사람은 몰려드는데, 정작 직원이 있는 창구는 몇 개 없다. 그마저도, 줄 서 있는 사람들의 입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갑자기 업무를 보던 직원은 말없이 사라지거나, 갑자기 공항직원이 어디선가 누군가를 데려오면 이 사람들은 특권을 가진 양, 줄도 서지 않고 새치기를 해서 바로 입국수속을 하고 유유히 나가버린다. 역시 이 공항에도 뒷돈의 힘이 작용하는구나 짐작해본다. 업무의 효율성이라든지, 'First come First serve'의 원칙도 없고, 멀리서 찾아오는 관광객들에 대한 예의도 없이, 어지러이 늘어선 줄에 서서 운좋게 내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상황이니 2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수속을 마치고 수화물을 찾으러 간다. 아니나 다를까 수화물은 이미 moving belt에서 빠져나와 한 구석에 내팽개 쳐져 있다. 입국부터 쉽지 않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안드레이는 입국수속이 오래 걸린다는 것을 이미 아는 사람처럼 비행기 도착해서 2시간이 지나서 공항 밖으러 나온 이방인을 오랜 기다림에 지친 표정이 아닌 밝은 표정으로 맞이해 주었다. 안드레이는 러시아 회사쪽에서 보내준 차량을 운전하는 기사로 공항 픽업을 해서 임시 숙소에 내려주는 임무를 맡은 청년이다. 러시아 땅에서 처음 만난 러시아인이자, 태어나서 처음 만나보는 러시아인이다. 아니 엄밀히 따지면 러시아에 일하러 온 카자흐스탄 출신 청년이다. 나랑 똑같은 외노자 (외국인 노동자)인 것이다. 묘하게 이 친구랑은 동질감이 느껴진다. 친절하게도 내이름 석자를 영문으로 출력해서 2시간째 들고 서 있었던 것 같고, 내가 가야하는 숙소의 위치를 적은 주소도 친절히 보여주면서 본인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2010년 3월 겨울왕국 모스크바는 눈발이 날리고 있다. 한국에서 3월이면 봄이 올텐데, 모스크바의 3월은 여전히 춥고, 겨울내내 제설차량이 도로 한켠으로 밀어둔 눈은 녹지 않고 작은 언덕으로 남아있고, 해마저 빨리 져서 오후 3시가 막 지나가는데 벌써 어둑어둑해진다.
이런 음흉한 날씨 때문인지, 낯선 이국땅에서 지나치는 사람들의 표정은 괜히 무뚝뚝하고 무섭기만 하다. 그런 와중에 뉴스 속보로 대낮, 모스크바 주거지역 한복판에서 유학생이 괴한에게 피습을 당해서 중상이라고 하니 머리가 쭈뻣쭈뻣해진다. 지난 달에도 단기 유학생이 러시아 외곽 지역에서 폭행당해 사망했다는 뉴스를 보고 잔뜩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앞뒤 긴장을 놓치 않고 다니는 마당에. 하필이면 내가 러시아에 도착하는 즈음에 이런 불미스러운 사건 사고가 계속 터지니 사람의 심리가 위축되는 건 당연할 것 같다. 이렇게 러시아의 첫인상은 새로운 곳에 대한 기대 반 설레임 반도 아닌, 두려움과 공포 그 자체로 시작되었다. 태권도나 합기도라도 배워 났으면 긴장감이 덜 했을 것 같다.
회사에서 임시 숙소로 정해준 곳은 호텔도 아닌 아파트였다. 지금으로 얘기하면 에어비엔비 같은 숙소로 침실, 거실, 작은 부엌이 있는 곳이다. 아파트 건물은 마치 거대한 수용소 같다. GS 자이, 현대 아이파크 같이 나는 아파트라고 친절히 말해주지 않는다. 아파트 건물이라고 인지할 만한 표시가 전혀 없다. 소비에트연방 시절에 지었을 법한 오래된 건물은 간헐적으로 들고 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아파트 입구라고 생각하기 힘든 검은색 철문을 따라 들어 가야 한다. 겨울내내 눈이 쌓여 아무도 놀지 않는 황량한 느낌이 나는 놀이터만이 여기가 사람들이 사는 주거지역이라는 걸 말해준다. 놀이터를 가운데 두고 아파트 건물안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드디어 보이기 시작한다.
참고로 아파트 위치는 좋았다. 모스크바 여행의 시작이라고 하는 아르바트 거리에서 불과 도보로 3분거리에 있었고, 모스크바 롯데백화점 (그렇다. 모스크바에는 한국에 있는 롯데백화점도 있고, 롯데호텔도 있다.)도 골목만 돌아 나가면 있는 곳이었다. 물론, 아르바트 거리며 롯데백화점이 숙소 주변에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된 사실. 2010년 3월 삼성전자는 갤럭시 S시리즈 스마트폰 출시를 발표하였으니, 그 흔한 스마트폰은 당연히 없었고, 임시 숙소에 와이파이나 인터넷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으니, 사실상 수용소처럼 외부와의 소통은 철저히 단절되어 있는 것이다.
회사에서 보내준 airport pick up 차량이 내려준 아파트 입구에서 숙소문을 열고 들어가기까지 그 짧은 순간도 긴장을 놓치 못하는 상황이었다. 숙소는 실내가 들여다 보이지 않는 육중한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70년대 영화에나 나올법한 수동방식의 엘레베이터가 나오는데 그 엘레베이터는 마치 타면 바로 고장이 날 것 같아 차마 올라타지 못하고, 계단을 걸어 숙소까지 올라가면 누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피습이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망상에 사로잡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급하게 숙소문을 찾아 열고 들어가서 문을 서둘러 잠궜던 기억이 있다. 그 상황에서 집열쇠는 주렁주렁 달려서 두 세번 키를 번갈아 넣어봐야 짝이 맞는 키를 찾아 문을 열 수 있는 곳이었다.
나중에 임시 숙소가 아닌 앞으로 2년간 살 집을 보러 다니면서 알게 되었지만, 부동산업자에 따르면 러시아 대부분의 집들은 이중 삼중 문단속을 철저히 한다고 한다. 그만큼 집열쇠도 하나가 아니요 최소한 두개 이상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리고 대문 두께도 총알이 쉽게 뚫고 가지 못할 정도로 아주 두꺼운 철문으로 되어 있어 힘껏 당기고 밀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묵직한 경우가 많다.
그만큼 러시아에는 무단침입으로 인한 강도 상해들이 빈번하다는 얘기도 더해져 사실인지 모르지만 그만큼 러시아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는 문단속을 철저히 하는 것은 당연하고 고급 아파트 단지에는 나이트클럽 기도 같은 팔뚝 굵은 경비원들이 아파트 입구에서부터 방문객에게 통성명을 무조건 하고 방문일지를 열심히 적는다. 심지어 매일 다니는 아파트 주민들도 통성명을 하고 몇동 몇호에 사는지 확인해야 1차 관문인 경비실을 무사 통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장장 반나절이 지나 러시아 모스크바 아파트 숙소에 도착. 러시아 Day 1이 마무리 된다. 여러모로 러시아 모스크바의 첫날 첫인상은 썩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