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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한양도성 인왕산에서 흥인지문까지 걷기

by 김기만

오늘은 한양도성의 북쪽을 걸어보려고 지인과 약속하였다. 독립문에서 출발하여 인왕산, 백악산, 낙산을 거쳐서 흥인지문에 도착하는 경로다. 경로중간에 창의문, 숙정문, 혜화문이 있다. 그중에 자하문이 있지만 자하문은 있다는 것만 확인을 한다.


지인과 만나는 시간이 남아 있는데 벌써 도착을 하여 독립문역 근처를 배회를 해본다. 독립문역 근처에는 많은 것이 있다.


한국인의 근원은 어디일까?

통상적으로 태백산, 마니산, 백두산 등등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중국의 경우 청나라의 예를 들면 만주족인 만큼 만주지역을 성지라고 하여 누구도 여기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청나라가 멸망을 하고 만주국을 일본이 괴뢰정부로 수립하였지만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이가 그것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우리의 경우 조선도 아니고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은 임시정부를 기반으로 하여 국가가 수립되었다고 헌법에 명시되어 있어 그 임시정부 기념관이 있는 곳이 독립문역에 있다.

또한,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독립함에 있어 많은 애국지사가 있었고 그 애국지사들이 고초를 겪었던 서대문형무소가 있는 곳이다. 1898년에 영은문을 대신하여 건축된 독립문도 있다.

지인이 도착하지 않고 있어 주변을 또 돌아본다. 독립문역 2번 출구에서 바라다보니 종종걸음으로 걷는 사람도 있고 인왕산을 오르기 위하여 지인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 좁은 골목을 지나면 선바위로 오르는 길이 있는데 그 길을 가기 전에 빵집도 있고 편의점도 있다. 서울의 평범한 골목길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지나면 다시 문명이 있기도 하고 자연이 있기도 하다. food truck에서 호떡을 파는 아저씨가 있다. 개시 손님이 되어본다. 오늘 하루 장사가 잘되기를 바란다.


지인이 도착하였다. 이제는 국사당을 거쳐서 선바위, 모자바위를 지나 인왕산 정상을 향한다. 골목길을 지나서 선바위로 가는데 계단이 있는 오르막이 보여서 그곳으로 가지 않고 옆으로 가니 막다른 골목이다. 다시 계단이 있는 오르막을 오른다. 오르막에 계단이 있고 그 계단 끝에 다시 아파트 단지가 있다. 아파트단지를 들어가는 길이 아닌 산을 오르는 인도를 따라 걷는다. 인왕산 인왕사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일주문도 있고 사찰이 있다. 등산로 주변은 암자다. 그리고 마지막에 국사당이 있다.

국사당을 지나고 선바위에 도착하였다. 선바위는 풍화작용으로 여기저기 구멍이 파여 있지만 마치 스님이 장삼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여 참선한다는 ‘선(禪)’자를 따서 선바위라고 불린다. 이곳에 대한 설화로 한국경제에 이렇게 기사화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무학대사는 선바위를 서울 도성 안으로 품자고 하고 정도전은 서울 도성 밖에 두자고 설전을 벌였다. 태조 이성계가 고민하다 눈 내린 인왕산을 보러 정도전과 나섰다. 그때 선바위 안쪽에는 눈이 녹아 있고, 선바위에는 눈이 녹지 않아 선바위는 성 밖으로 남겨지게 됐다. 그런 이유로 서울 도성에 안과 밖이 생기게 됐다고 전해진다. ‘서울’이라는 지명은 눈 울타리, ‘설울’이라고 부르다가 서울이 됐다고 한다(한국경제신문, 2018.12.2).


선바위를 지나 안산에서 올라오는 길을 만나고 한양도성의 성곽이 복원된 곳으로 간다. 성곽이 복원된 현장이다. 이제부터 인왕산 정상을 거쳐 창의문을 지나 백악산 숙정문으로 갈 것이다. 한양도성은 도읍으로 정한 후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으로 태조 5년(1396), 백악(북악산) · 낙타(낙산) · 목멱(남산) · 인왕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축조한 이후 여러 차례 개축하였다고 한다. 그 개축된 역사를 그대로 볼 수 있는 곳이 곳곳에 있고, 대통령 집무실이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이전한 후 모습이 변화된 모습도 확인이 가능하다.


성벽의 축성시기별 모습(서울시한양도성 홈페이지(https://seoulcitywall.seoul.go.kr/content/10.do)

인왕산은 1968년 1.21 사태 때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다가 1993년 개방되었고 점진적으로 확대 개편된 후 최근 용산으로 대통령 집무실이 이전된 후 민간인의 출입에 이제는 제한이 없다. 예전에 있던 군부대 막사는 폐쇄되어 있다. 백악산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부대가 없다. 예전에 경호를 위한 인원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으나 그들의 모습이 없다.

인왕산을 오르면서 모자바위, 치마바위를 지나고 정상을 향해 간다. 멀리 있는 청와대를 보고 사진을 마음대로 찍을 수 있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청와대 방향으로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누군가가 와서 눈총을 주고 그것을 말렸는데 그런 사람이 없다. 봄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산행을 하고 있다. 인왕산 정상목이 있다. 그 정상목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남기고 있다. 창의문으로 가기 위하여 하산을 한다.


내려가면서 인왕산 정상을 바라다볼 수 있는 곳에 앉아 쳐다본다. 그리고 기차바위로 방향을 잡아가본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이정표를 보았을 때 Train Bawi라고 되어 있었는데, 오늘은 kicha Bawi라고 되어 있다. 기차바위가 있는 곳에서 다시 한번 인왕산 정상을 둘려본다. 창의문으로 직접 내려가는 것도 좋지만, 한 번쯤 500m 내외로 가볼 수 있는 곳이 기차바위다. 기차바위를 창의문으로 내려가면서 쳐다보면 그 바위의 위용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창의문에 가기 전 시인의 언덕이 있고 그 아래에 윤동주 문학관이 있다. 윤동주 선생이 연희전문을 다닐 때 이곳에서 하숙을 하여서 이곳에 문학관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시인의 언덕은 시인이 이곳에서 시상을 떠올렸다고 보고 시인의 언덕이라고 하였다. 이곳에 서시도 있고 슬픈 족속이라는 시가 있다. 나는 윤동주 시인의 시중에 이 슬픈 족속이 더 우리를 슬프게 하면서 우리를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츤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사실 윤동주 문학관은 예전에 배수장을 사용하던 것을 문학관으로 바꾸어서 사용하고 있어 특색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윤동주 문학관 앞에서 그냥 스치고 지나가 본다. 문학소녀도 아니고 땀에 젖어 있어서 밖에서 그것을 지켜볼 뿐이다. 아쉬움이 있지만 어쩔 수 없다. 등산을 하고서 흘린 땀이 있는 상태에서 실내공간에 들어가서 그것을 감상한다는 것이 아쉬움이 있어서 지나친다. 이웃한 횡단보도를 건너니 1.21 사태 당시 순직한 경찰관의 동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분의 뜻을 기리고 창의문으로 올라간다.


창의문을 올라가는 데 초등학생 4명과 같이 올라가는 문화해설사 선생님이 있다. 초등학생 4명이 올라가면서 힘들지 않게 배려를 하면서 설명을 차근차근하고 있다. 잠시 쉬었다가 가면서 사진도 찍는다. 사진을 찍으면서 약간만 부족하면 다시 촬영을 해준다. 배려가 참 좋다. 저런 선생님과 같이 다니면 아이들도 역사를 재미나게 힘들지 않게 배울 것이다. 창의문에서 예전에는 신분증을 확인하고 비표를 교부하였으나 이제는 없다. 안내인 1명이 자리 잡고 있다. 누가 물어보면 답을 한다. 이제 백악산을 오른다. 계단의 연속이다. 청와대에 대통령이 집무할 때와 차이가 있다. 예전에 경호를 위한 인원이 있었으나 없다. 그리고 경계를 위한 초소가 있었으나 이제는 자물쇠가 달려있을 뿐이다.

숨이 이제 가득 가슴을 채우고 더 이상은 견디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는 순간 쉼터가 나타난다. 그 쉼터에서 우리가 지난 온 길을 쳐다볼 수 있다. 한순간을 쉬어가면서 돌아볼 수 있어 좋다. 미세먼지의 영향으로 멀리 북한산의 비봉능선이 그렇게 깨끗하게 보이지 않지만 우리들의 눈에 거침없이 들어온다. 족두리봉, 향로봉, 비봉, 승가봉, 보현봉이 보인다. 그리고 이곳에 1.21 당시의 소나무가 있다면, 승가봉 바로 직전에 있는 사모바위 아래에 있는 1.21 당시 넘어와서 숨어 있던 모습을 재현한 곳이 생각이 난다. 다시 오른다. 100m 남짓한 거리를 오르면 이제는 백악산이라는 정상석이 있다. 오늘 오르는 것은 이것으로 끝이다. 사실 낙산이 있지만 힘겹게 오르는 것은 이것으로 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백악산 정상에 있는 바위에 올라 사방을 둘러본다. 그래도 가장 가까이 있는 인왕산이 눈에 가깝고 이제 갈 길이 보인다.


1.21 당시 소나무에 있는 총탄흔적을 확인하고 청운대로 간다. 예전에는 청운대에서 성곽을 넘어갔는데 이제는 성곽을 넘어갈 수도 있고 그대로 성곽 안으로 걸어갈 수도 있다. 이곳을 개방하면서 군부대가 떠난 자리가 그대로 드러나고 그곳에 숨겨져 있던 자리가 이제는 등산객의 쉼터가 되어 있다. 청운대에서 성곽을 넘어가면 평탄한 흙길이고 그대로 내려가면 데크로 된 길이다. 이곳에서 삼청동안내소로 내려갈 수도 있다고 한다. 많은 길이 다시 생성되어 있다. 3년 정도 시간이 흐르니 등산로가 새로 생성된 것이다. 한양도성을 걷고 있는 우리는 삼청동으로 갈 수 없는 것이다. 그대로 직진이다. 곡성이 나타난다. 곡성을 올라서서 사방을 둘러보고 이제는 숙정문으로 방향을 잡고 내려간다.


숙정문을 가기 전 촛대바위가 있는데 이곳에서부터 소나무군락지를 보호하기 위하여 성곽 주변으로 걸을 수 있도록 보호를 하고 있다. 예전에는 소나무군락지 주변에 등산로가 있었는데 이제는 그곳은 보호대상이다. 보호하지 않았을 때 소나무 뿌리가 드러났었는데 이제는 소나무가 숨을 쉬고 있는 것 같다. 숙정문에 도착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삼청각 방향으로 하산을 한다. 숙정문은 한양도성의 중요한 문중에 하나였지만 그렇게 많이 사용되지 않은 문이다. 숙정문에서 말바위안내소 방향으로 걷는다. 말바위안내소에서 비표를 반납한 기억이 있었는데 이제는 말바위안내소에는 스탬프가 자리를 잡고 있다. 한양도성을 순례를 하면서 스탬프를 날인하는 곳이 있는데 북쪽으로는 유일하게 이곳이다.

와룡공원과 삼청공원의 이정표가 나온다. 와룡공원으로 방향을 잡고 성곽을 넘어간다. 하지만, 아쉬움이 있어 10m 조금 더 가면 있는 바위에 가본다. 이곳이 말바위지역이다. 그런데, 말바위가 어느 것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돌아와서 성곽을 넘어간다. 성곽을 넘으면서 성북동의 주택가를 돌아본다. 산기슭에 주택들이 즐비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평창동에 최고급 주택가자리를 넘겨주기 전까지 최고급 주택가의 상징인 성북동이다. 그래도 그 명맥은 유지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 성 근처에 있는 주택은 개발제한으로 이제는 황폐화되어 있다. 수리도 어렵다. 그것이 현실이다. 와룡공원 근처에서 고민을 하다가 성곽밖으로 걷다가 성곽 안으로 들어선다. 서울과학고가 있다. 그리고 이제는 성곽이 훼손된 현실을 볼 수 있다. 개발이 되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성곽은 허물어지고 성곽 위에 주택이 들어서 있다. 초등학교 자리에서는 성곽은 보이지 않는다. 혜화문 근처에서 성곽을 복원하기 위한 공사가 한창이다. 그리고 성곽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준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혜화문 바로 옆을 파내어 혜화문이 한참 위에 있다. 이제는 낙산으로 간다. 성곽의 모습이 그대로 보여준다. 성벽을 축조할 때 지역실명제가 된 모습을 보여준다. 해당지역을 책임진 곳이 무너지면 해당지역 사람들이 와서 다시 축조했다고 한다. 일본의 오사카성에 갔을 때가 생각이 난다. 도요토미가 최고의 실력자가 된 후 지역의 영주들이 그지역의 돌들을 오사카로 옮겨서 성을 완성한 것이며 그 지역에서 가장 큰 돌을 옮겨왔다고 한다. 그 애환은 농민들이 그대로 부담하였는데 우리들도 해당지역의 농민들이 책임을 졌을 것이다. 성곽 주변까지 올라온 주택이 있고 그 주택들이 다양하다. 카페를 운영하는 곳도 있고 지붕을 나 혼자 전망대로 만들어 놓은 사람도 있고, 그 옥상에 화분을 올려놓아 무엇을 재배하는 사람도 있다. 그 모습을 다 볼 수 있다.

낙산이다. 버스가 이곳까지 올라오는 것이 신기하고 버스가 넘어 다닌다. 벽화마을이 있고 카페가 옛 건물을 장악하고 있다. 경치가 좋은 곳은 입장하기 위하여 무엇을 사야 한다. 자릿세라고 해야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카페로 탈바꿈하고 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카페가 있다. 예전에는 벽화마을이었는데 벽화보다는 카페가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낡은 건물이 카페였지만 이제는 그 위에 아기자기하게 다시 모양을 내고 있다.


벽화마을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퇴색되어 가는 것이 아닌데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도록 하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벽화는 퇴색되어 가고 낡은 건물이 묘미가 되었었는데 새로운 건물이 나타나서 그것을 퇴색시킨다.

흥인지문으로 내려가면서 공원이 있다. 지인은 이곳에 예전에 이대동대문병원이 있었다고 하니 믿지 못한다는 표정이다. 사실 이대에서 목동병원이 설립되고 동대문병원이 경영에 어려움이 있고 서울시에서 성곽복원사업을 하면서 그 부지가 철거되고 공원이 되었는데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다.


흥인지문으로 내려간다. 광장에서 종교집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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