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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찾은 계방산 여름산으로도 제격이다

이효석문학관은 덤으로

by 김기만

장마가 약해지면서 더위가 오고 있다.

태양이 가장 가까이 있을 때 더위가 오는 것이 아닌 태양이 가까이 왔다가 멀어지면서 여름은 7월 장마가 끝이 나면서부터 여름이 시작되고 더위가 한창인 것 같다. 우리에게 여름은 땀이 나는 여름이다. 나 어릴 적에는 나무밑에서 평상이 있고 그 그늘아래에 있어만 있어도 시원하다고 느꼈는데 이제는 도시화가 되어 있어 도시에서 품어내는 열기가 우리를 한증막처럼 만들고 있어서 나무 그늘 밑이 시원하지 않다.


어릴 적 더우면 개울에 멱을 감고 하던 시절이 그립지만, 나는 해발이 높은 곳에서 자랐다. 해발 400m가 넘는 곳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지금도 그곳이 그립다고나 할 것이다. 그렇게 덥다고 느끼지 못하였다. 하지만, 시골에서 어른들이 다 논밭으로 나가고 조용한 마을에 햇빛이 마을을 그대로 장악하고 있을 때 이글거리는 태양보다는 개울을 찾았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7월 말이다.


도시에서 품어내는 열기가 싫고 그 근처에 있는 산들도 도시의 열기를 그대로 안고 있는 것 같아서 멀리 산을 찾는다. H가 이야기하기를 여름은 해발 1000m 이상에서 놀아야 한다고 하였다. 여름이면 피서지로 바닷가를 찾지만 나는 바닷가가 아닌 산속을 찾았고 그곳에서 푸르름을 그대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7월이 되면 장마가 있고 그 사이사이에 비가 그치고 태양이 이글거린다.

우리가 동해안을 많이 찾는 이유는 여름에 동해안은 북위 37도 정도까지 한류가 흐르기 때문에 더위보다는 찬바람이 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바람이 대관령을 넘어 올라올 때는 더욱 차게 흐른다. 그곳이 평창이다. 오늘은 그곳에 갔다. 평창은 동계올림픽을 개최한 도시이지만 그곳에 있던 마스코트만이 한두 곳에 보일뿐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평창은 Happy700이라는 표어로 지역을 상징하는 표어로 사용하고 있다. 곳곳에 그렇게 표시되어 있다. 해발 700m 지점이 행복한 고도라는 의의라고 한다. 그러면,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북한산 정상 주변이 가장 행복하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평창에는 해발이 높은 산들이 많다. 우리에게 익숙한 오대산, 가리왕산이 있고 겨울철이 유명한 계방산, 선자령이 있다. 선자령 주변에서 비박을 하면 그럭저럭 시원할 것 같다. 겨울철에 유명하지만 해발 1,089m인 운두령 자체에서 1,577m인 정상까지 이르는 계방산 능선은 여름에도 괜찮을 것 같아 가 보았다.

J랑 전날 산행지를 정하기 위하여 카톡으로 이곳저곳을 눌러보다가 폭염에 도시는 벗어나고픈 생각에 평창이 생각이 났고 처음부터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을 선택한 것이 계방산이다. 계방산은 1,577m로 북한을 제외한 한반도에서 5번째로 높은 산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는 겨울산으로만 알려져 있다. 한라산 1,950m, 지리산 1,915m, 설악산 1,708m, 덕유산 1,614m , 계방산 1,577m, 함백산 1,572m , 태백산 1,566m , 오대산 1,563m이다. 함백산은 만항재에서 싶게 올라가서 사람들이 쉽게 처리하고 계방산은 이웃한 오대산이 유명하여 그 이름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계방산에 도착하여 계방산에 소개한 자료를 보니 계수나무 계자와 향기(빛나다) 방자가 합쳐져 계방산이라고 불리어지고 있다고 안내되어 있다.


J를 픽업하기 위하여 아침 일찍 움직인다. 일찍 일어나는 새는 먹이를 싶게 먹는다고 하였지만, 일찍 일어나는 벌레는 빨리 잡혀 먹힐 뿐이다. 우리는 벌레는 아니고 새다. 그렇게 일찍 움직여서 J를 픽업하고 움직인다. 고속도로는 아직 이른 시간이라 조용할 뿐이다. 계방산 산행은 나는 두 번째이고 J는 세 번째라고 한다. 하지만, 기억이 거의 없다. 다만, 운두령 정상에 있는 풍력발전기만 생각이 날 뿐이다. 그리고 운두령을 올라가기 전 이승복 기념관이 있다. 1968년 1.21 울진 삼척지구에 침투한 북한군에 의하여 희생된 사람의 흔적이 있는 것이다. 그 후 우리나라는 예비군이 창설되고 격변의 세월을 보냈다. 그것인 진실이 아니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비정규군을 침투시켜 교란시킨 행위 자체는 잘못되었고, 그곳에서 어린아이가 희생된 것은 사실인 것이다. 지금도 고속도로에서 10km 정도 들어와야 하는 오지인 곳, 그리고 계방산 바로 아래 동네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을 우리는 외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운두령을 오르면서 자동차는 힘을 내고 있다. 엔진 소리는 없지만, 운전하는 내가 힘을 내고 있다고 옆에 앉은 J가 이야기한다. 자동차보다 내가 힘을 쓰고 있다고 한다. 엑셀을 발고 오르면서 자동차와 일체가 되어서 움직이는 것 같다. 낮은 터널을 지날 때 운전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머리를 숙이고 지나가는 것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운두령 정상에 도착하였다. 4년 전 이곳에 왔을 때 새벽이었고 그때도 풍력발전기는 돌아갔다. 그때 그 바람소리가 무서웠는데 오늘도 소리는 요란하다.


J가 내가 준비하는 사이 노점에 물건을 내놓고 있는 아주머니와 이야기한다. 그곳에 있는 토종장류와 꿀등을 판매하고 있었다. 피나무 꿀이 있는데 무척이나 비싸다고 이야기한다. 아카시 꿀은 들어보았는데 피나무 꿀은 처음이다. 운두령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계방산을 향해 발을 내딛는다. 이곳보다 낮은 곳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 데 있었다. 처음 올랐다가 조금 내려서는 안부가 1,073m였다. 능선길을 올라서니 시원하다. 아니 춥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산아래는 폭염주의보가 내려져 있지만, J는 산 위는 선선한 가을 날씨라고 한다.

오늘 산행은 부지런을 떨지 않고 천천히 걸으면서 계방산 등산로를 즐기는 것이다. 야생화를 담고 그 이름을 알아가는 것이 오늘의 산행 테마다. 야생화에 대한 젬병인 우리는 오늘도 그것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처음부터 나타난 야생화를 알지 못하여 집단지성을 이용한 앱을 이용하였고 그것을 잠시 지나간 다음 또 그 이름을 잊어버리고 또 찾았다. 우리는 야생화 젬병이라고 서로를 쳐다본다.



동자꽃 도라지모시대 하늘말나리

어느 순간에 2km를 왔는데 조금 쉬어가면서 돌아보니 나는 고릴라라고 하고 J는 스핑크스라는 바위가 있다. 돌아보면서 여유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각자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본다. 그렇게 주변을 돌아보면서 산행을 하는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다. 힐링산행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 전망대까지 어려운 길이란 안내가 있다. 그 길을 오르기 전 여유를 찾고자 한차례 휴식을 취하고 계단을 오른다. 거미줄이 내 얼굴을 때려서 앞서간 사람들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는 데 있다.

나비가 춤을 추고 있다.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옮겨 다니면서 꽃들의 수분을 촉진시킨다. 나비를 보면서 나방과 차이가 무엇일까 선문답을 하였다. 첫 번째로 이름이 차이가 나다. 나비와 나방이다. 두 번째로 나비는 낮을 좋아하고 나방은 밤을 좋아한다. 세 번째로 나비는 꽃을 좋아하지만, 나방은 좋아하지 않는다. 나비를 좇아서 사진을 담아보지만 나비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고 지나가버린다. 나비가 날아가지만 우리는 그것을 바라다본다. 한 마리의 나비가 되어 이 꽃과 저 꽃에 앉아 본다.


지나가면서 이상하게 생긴 나무가 있고 잘 생긴 나무가 있다. 두 그루를 담아보았다. H가 보았으면 이상하게 생긴 나무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할 것 같은데 오늘은 같이 오지 못하 것이 아쉽다.

둥근이질풀

전망대를 올라서는 계단에 들어섰다. 앞에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녀가 있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지난다. 어린 딸과 같이 산행을 하는 엄마를 보니 보기가 좋다. 그리고 우리가 전망대에 들어서니 우리에게 모녀를 어디서 만났는지 물어보는 사람이 있다. 아빠와 아들이다. 한가족이 함께 계방산을 산행을 하는 것이다. 정상에서 다시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가족이 100대 명산을 걷고 있고 아이들이 벌써 15번째 오른다고 하였다. 아이들에게 아주 재미있는 추억을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엄마랑 아빠랑 같이 산행한 추억은 평생을 갈 것이다.

전망대에 올라서서 설악산을 바라보니 설악산은 보이지 않고 구름 속에 가려져 있다. 그리고 이웃한 계방산 정상이 있고 오대산의 비로봉과 호령봉이 보인다. 우리가 4년 전에 그곳을 지나 본 기억이 있고 그곳에서 관목의 나뭇가지에 걸려서 고생한 기억이 있다. 오늘은 거기까지는 안 가고 계방산 정상까지만 가고 원복 할 것이다. 이제 1km 남았다. 정상을 갔다 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 국립공원공단에서 설치해 놓은 야생화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야생화를 공부한다. 그리고 잊어버린다.

정상에 올라섰다. 그곳에 스님 두 분이 올라와서 맛있게 식사를 하면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어디서 오셨냐고 물으니 상원사에서 오셨다고 한다. 우리는 스님들이 상원사에서부터 비로봉을 올라 이곳까지 온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아니었다. 운두령에 우리와 같이 주차하고 올라오셨다고 한다. 이분들이 먼저 내려가셨다. 그리고 우리는 천천히 휴식을 하다가 내려왔다. 그리고 운두령에 도착하기 전에 다시 만났다.


정상석의 글자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의 글자를 집자하여서 만든 것이라는 친절한 안내가 정상석 뒤편에 있었다. 정상석을 보면서 어떤 곳에는 지방자치단체가 만들어 세운 곳도 있고 하는데 이곳은 국립공원공단에서 만들어 세웠다. 정상석 글자 중에는 경북 봉화 청량산의 정상석이 신라시대 명필인 김생의 글자를 집자하여 세워 놓은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정상석에 어떤 사람들이 훼손한 것도 보았다. 있는 그대로 보았으면 한다.

이제 가족 산행객이 나타났다. 아빠를 선두로 하고 아들이 올라오고 엄마와 딸이 같이 올라온다. 씩씩하게 올라오는 아이들이 대견스럽다. 정상에 앉아서 쉬고 있는데 이제는 춥다. 여름날 서울은 폭염경보가 내려져 있는데 계방산 정상은 한기가 느껴진다. 이것이 산행맛이라고 할 것이다. 겨울산으로만 유명한 계방산을 여름산으로 즐기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우리도 하산을 한다. 올라온길을 다시 내려가는 것인 만큼 그렇게 호기심은 없지만 내려가면서 올라왔던 길을 다시 한번 상기하는 것이다. 전망대에 서서 올라갔던 정상도 돌아보고 멀리 설악산 능선도 바라다본다.


내려오면서 다시 야생화를 몇 개 담아보았다. 그 야생화가 그 야생화이지만 또 다른 맛이 있었다.

우리가 이렇게 가파른 길도 올라왔던가 하면서 돌아보는 계단길도 지나고 고릴라 또는 스핑크스 바위를 지나서 안부에 도착하고 다시 올라선다. 이렇게 많이 내려왔던가 생각하면서 올라간다. 우리는 쉬지도 않고 걸었는데 스님들이 따라잡을 것 같은데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빨리 걷지 않을 것 같은데 생각하면서 운두령을 내려가는 봉우리에 올라서니 저만치 스님들이 있다. 그리고 운두령을 내려가는 계단에서 쉬고 있다.


스님들하고 이것저것을 얘기를 나눈다.


"스님들은 어떻게 산을 오셨어요?"

"오늘 하안거 중 휴식하는 날이라 밖으로 운동 왔지요. 어디서 오셨어요"

"우리는 서울에서 왔지요"

"스님들도 이렇게 산을 다닐 수 있는 날이 많은 가요"

"그렇지도 않아요. 우리도 쉴 수 있는 날이 그렇게 많지 않지만 쉬는 날이 있고 이날 운동삼아 온 것입니다"

"산을 친구들하고 다니면 보살님들이 뭐라고 하시지 않나요"

"그래도 친구랑 같이 다니면 괜찮아요"

"우리는 스님들이 상원사에서 오셨다고 해서 비로봉을 올라와서 이곳까지 오신 것으로 알았어요"

"한두 번 다녀본 적은 있지만, 오늘은 가볍게 산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좋은 산행 하세요"

"좋은 산행 하세요"


이렇게 우리는 한동안 담소를 나누고 헤어졌다. 나중에 한번 상원사를 갔을 때 한번 찾아뵈어야겠다.

스님들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고 와서 나중에 얼굴로 찾아뵈어야 한다.


J가 서둘러 자동차에 탑승한다. 도착하였을 때 만나 아주머니를 만나지 않기 위해서다. 혹! 그때 꿀을 맛보라고 하였는데 마음이 그래서 구매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운두령을 내려서고 우리는 이효석문학관으로 발을 돌렸다. 등산모드에서 이제 소풍모드로 변화를 꾀하는 것이다. 무조건 등산모드보다는 소풍모드가 필요한 것이다. 산을 내려가면서 내비게이션으로 이효석 문학관을 탐색하니 20km가 넘는다. 고민을 하였지만 돌아가는 길에 있다면 문제가 없다. 이효석 문학관은 봉평이라는 곳에 있는데 우리는 그것이 진부 쪽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아니었다. 횡성 가까이 있는 것이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장돌뱅이인 허생원이 조선달과 함께 봉평장을 파하고 대화장으로 넘어가면서 동이를 만나고 이야기하는 것이 전체적인 줄거리이고 그곳이 봉평면인 것이다. 봉평면에서는 이를 이용하여 다양한 볼 걸이를 만들고 그것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 우리도 그것에 동참한 것이다. 이효석 문학관이 있고 생가가 또 있다.


일제강점기 우리 문인들은 다 박명하였다. 그렇게 길게 살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길게 살았다면 이광수, 홍난파, 서정주와 같이 친일인사로 낙인찍혀 있을 것인데 어쩌면 그것이 새옹지마라고 할 것이다. 김유정도 그렇고 이효석도 그렇다. 이외에도 일제강점기 때 단명한 문인들을 보면 주옥같은 시를 남긴 김소월, 이육사, 윤동주, 이상 등등이다. 참 안타까운 사람도 많다. 옥사를 한 윤동주는 더욱 안타깝다. 그래서 그의 시가 우리의 뇌리에 그대로 남겨지는 것 같다.


봉평에 들어가면 허생원과 나귀 그리고 동이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봉평은 메밀을 이용하여 다채롭게 무엇인가를 한다. 효석문화제도 메일꽃이 필 때쯤 개최된다. 그 축제를 위하여 메밀밭을 조성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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