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성보에서 강화읍까지다.
사실 이 길은 혼자서 걸었다. 친구가 일정이 있어서 동행을 하지 않아 혼자 걸었다. 광성보에서 출발하여 강화읍까지 걸어왔다. 광성보는 2코스에서 지나 온 길이고 강화읍 시외버스터미널이 시작점이다. 나는 반대로 걸었다. 2코스와 같이 걷다가 오두리 돈대에 미치지 못하여 오두리 마을로 들어간다. 강화해협 동쪽을 보면서 특별히 감흥이 있어야 하나 그렇지 않다.
마을 모양이 마치 자라의 머리처럼 좁고 길게 뻗어나간 곶이 있어 오두리라 부른다. 일설은 조선시대에 오두정이란 정자가 있던 마을이라 오두리라 하였다고 한다.
강화의 농촌마을 풍경을 보면서 이렇구나 하고 지나갈 뿐이다. 간척된 땅을 보면서 강화의 간척의 역사를 보았다면 이번 길은 원래의 강화를 보는 것이다.
순무골이라는 이름의 회사가 있어 강화의 특산품인 순무에 대하여 이것저것 알아보았다. 강화도 이외에 순무가 재배되는 경우는 보지 못하였다.
강화군청에서 설명하기를 강화순무의 생김새는 팽이 모양의 둥근형으로 회백색 또는 자백색이고 강화지역에서는 오늘날까지 김치의 재료로 가장 보편화된 채소의 일종이며 강화순무는 그 맛이 매우 독특하여 처음 먹어보는 사람도 매료되며 한번 입맛을 익히면 두고두고 찾게 되는 훌륭한 식품으로 순무의 맛은 일반적으로 달면서도 겨자 향의 인삼 맛이 나며, 한편으로는 배추 뿌리의 진한 맛을 느끼게도 한다고 한다
순무는 전 세계에 여러 종류의 것이 재배된다. 모양과 때깔이 실로 다양하다. 조그맣고 빨간색의 레디쉬도 순무 중 하나이며 강화 순무는 중국에서 전래되어 삼국시대 때부터 재배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조선말 해군사관학교 격인 통제영학당이 강화읍 갑곳리에 세워지고 영국 정부에서는 군사교관으로 콜웰(W.H. Callwell) 대위와 조교 커티스(J.W. Curtis) 하사를 파견하는데, 이때 콜웰이 영국의 순무 종자를 가져와 강화읍 갑곶리의 사택 주변에 심었다고 말이 전한다. 당시까지의 강화 순무는 뿌리가 흰색이었는데 콜웰의 순무는 보라색을 뗬다. 지금의 강화 순무로 널리 알려진 그 색깔이다. 그러니까 콜웰의 순무가 강화에 크게 번져 지금의 명성이 쌓인 것으로 볼 수도 있다고 한다. 이것을 볼 때 식물이 이 지역 저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번식되고 그 영역이 넓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순무는 내륙으로 확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산길도 있고 마을도 지나간다.
그리고 나들길의 설명에서 화남 고재형 선생이 1906년 강화도의 유구한 역사와 수려한 자연을 노래하며 걸었던 강화의 끊어진 길을 잇고 잊힌 길을 찾아 강화가 품고 길러낸 자연과 땅 위의 모든 것과 연결한 길이라는 설명이 있듯이 이분이 살았던 생가도 지나간다. 나들길의 원조는 이분이 걸었던 길인 것이다.
화남 고재형 선생은 강화 곳곳을 노래한 칠언절구의 한시 256수의 '심도 기행'이라는 기행시집으로 남겼다. 그 시집 완역본 발간사를 보면 심도기행(沁都紀行)』에 수록된 한시 작품들은 강화의 오랜 역사와 수려한 자연, 그리고 강화가 길러낸 수많은 의인과 지사들의 행적에 바치는 아낌없는 찬가(讚歌)이다. 기행 시문은 강화도 선비 화남 선생이 지은 것으로 모두 256 수의 7언 절구가 수록되어 있는데,
당시 강화군 17개면 100여 마을을 필마(匹馬)에 의지하여 빠짐없이 섭렵하시고 쓰신 기행시집으로 대부분 강화의 마을 유래와 풍경, 주민의 생활상을 소재로 삼고 있다고 쓰여 있다.
이분이 살고 있던 두두미동에 대한 칠언시를 보면
斗頭我步帶春風 봄바람 맞으며 두두미를 걷노라니,
一府山川兩眼中 온 마을의 산과 내가 한 눈에 들어오네.
明月綠楊諸具榻 밝은 달 푸른 버들 여러 구(具)씨 탁상에서,
滿杯麯味使人雄 잔 가득한 술맛이 힘을 내게 하는구나.
해설서 글을 빌리면 두두미동(斗頭尾洞)은 강화부 관아로부터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인정면(仁政面)에 속한다. 우리 집안이 대대로 살아온 곳이다. 병오년(1906) 봄에 내가 비록 병이 있는 몸이지만 강화부 전체의 산천을 다시 관람하면서 고적을 살펴보기 위해 길을 떠났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를 따라 걸음을 옮겼으니, 두두미를 출발하여 다시 두두미로 돌아오려는 계획이었다.
오랫동안 사귄 친구 구(具) 씨 집에서 술을 몇 잔 마신 후에 서쪽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이다.
선원사지 입구에 연못이 있고 그곳에 연꽃의 흔적이 있다. 연꽃축제를 이곳에서 한다고 한다. 서울 인근이라 이곳도 만원이 될 것이다.
선원사지다.
강화군청 홈페이지에 보면 선원사지는 1976년 동국대학교 강화도 학술조사단이 강화도 일원에 대한 지표조사에서 처음 발견하였다. 발견 당시 이곳에서 몇 개의 주춧돌을 비롯하여 보상화 무늬 전돌, 범자(梵字) 새긴 기와, 지붕에 얹었던 잡상들을 확인하고, 선원면 도감 마을, 도감산에 있는 사지이므로 학술적·역사적으로 가치가 있어 지역의 연원을 기초하여 1977년에 사적 제259호로 지정되었다. 1996년부터 4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건물터, 축대와 연화문 기와, 금동탄생불, 청동나한상 등이 출토되어 사찰과 관련된 유적으로 규명되고 있다. 독립된 건물지 21개소와 부속 행랑지 7개소가 확인되었으며, 건물들은 북고남저의 지형 위에 동서로 긴 4개의 층단을 두고 빼곡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부 대형건물지(기단길이 38m)에는 삼존불을 지탱한 것으로 보이는 불단 유구가 확인되었다. 건물지가 집중되어 있는 중심구역으로 남북 길이 180m, 동서 너비 180m 정도이다. 출토유물은 자기류, 기와류, 소형 청동탄생불, 금동나한상, 탄화된 사경편 등이 있다. 자기류(총 2,300여 점)는 12세기 후반∼14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청자 편이 대부분(94%)이고, 막새기와류는 연화문, 범자문, 귀목문이 대부분이고 ‘박씨(朴氏)·유씨(劉氏)’명(銘) 막새도 있고, 취두편은 모두 21개가 수습되었다. 고려시대 문인인 최해(崔瀣)의 문집인 『졸고천백(拙藁千百)』에는 선원사가 송광사와 함께 고려의 2대 선찰로 손꼽을 수 있다고 하였다고 설명되어 있다.
고재형은 선원사에 대하여 이렇게 시를 지었다.
禪源古寺問阿誰 선원사 옛 절을 누구에게 물어보나,
流水桃花處處疑 시냇물에 복사꽃 떠오는 곳곳마다 의심 가네.
寂矣半千龕月影 적막토다 오백불상 달그림자 속에 들고,
黃金銷盡碧蘿垂 황금불상 다 녹아서 푸른 덩굴 드리웠네.
고려가 개경에서 강화로 천도를 한 후 호국사찰로 건축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폐허가 된 것은 항목 투쟁이 끝난 후 몽고가 환도 시 고려궁지를 파괴한 것처럼 이 사찰도 파괴할 것을 요청해서 그렇게 되지 않았나 추측해본다. 해인사 대장경이 강화에서 제작되었는데 제작된 곳으로 이곳을 학계는 추측하기도 한다고 한다. 강화에서 제작하였지만 제작한 곳이 사찰이 아니면 어디 간 있을 것인데 그럴만한 곳이 없다고 한다. 선원사는 당시 호국 사찰이었고 국가에서 이를 관리하였으므로 가능하였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동국대학교 박물관은 계속적으로 연구할 것이다.
선원사지를 지나기 전까지 농로와 유사한 들길의 연속이었으나 선원사지에서 산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산길이라고 하여 힘들게 가는 산길이 아니고 산책길이다. 2-3명이서 담소를 나누면서 걸을 수 있을 정도다. 걷기 편한 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도감산이다 해발이 높아야 130m 정도다. 산길을 돌아 나가면 강화읍이 보이는 고식이 들판 조산평이라고 불리는 너른 논이 펼쳐진다.
고재형은 조산평에 대하여 이렇게 소개했다.
一平廣濶造山坪 평평하고 널따란 조산평 들판엔,
農老紛紛聽水聲 농부들이 분주하게 물을 대고 있구나.
最是江都膏沃地 이곳은 강화에서 손꼽히는 옥토이니,
府城富客擲金爭 성안의 부자들이 다투어 투자하네.
이 들판도 간척된 곳이라고 한다. 섬에 이렇게 넓은 들이 있는 것은 간척 외에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