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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감성육남

39년생 욕심쟁이 정숙 씨

황혼에 물드는 애잔한 자기 학습 열정

by 샤인



그녀는 39년생이다. 아버지는 4.19 혁명 무렵 민선 면장을 역임했다. 소녀 시절에는 부족함이 없이 자랐다. 오빠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기 전까지는 막내로 아낌없는 사랑도 받았다. 거기까지였다. 아들이 ‘급행’이었던 시절 면장 딸은 초등학교만 간신히 졸업했다. 당시 ‘비둘기호’ 만도 못했던 딸 들은 중학교 진학은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다. 특히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다. 기울어진 가세에 집안일을 돕다 보니 어느덧 혼기가 다가왔다. 그때 나이 23살. 정숙 씨는 맞선으로 회이포 근처 솟재 댁이 되었다. 5남 1녀의 장손 며느리는 이제 매일 듣던 기차 소리도 멀어졌다. 친정을 떠나 바닷가로 삼십 리 길이니 쉽게 오갈 수도 없는 노릇.


둘째 딸까지 솟재에서 낳고 시집살이를 하다가 남편이 철도토목원으로 취직이 되어 옥마역(현 보령시청 부근) 근처로 제금(딴살림의 방언) 났다. 거기서 셋째 딸을 낳았다. 남편의 봉급을 알뜰히 굴려 목돈을 만들고 그 돈을 모아 지금의 주포에 집을 장만했다. 거기서 딸 셋을 더 낳았다. 딸, 딸, 딸, 딸, 딸, 딸. 합이 여섯이다. 동서들은 아들도 잘 낳는데, 그녀만 딸부자가 되었다. 갈 때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낳은 것이 드디어 아들. 막내다.


그 아들까지 7남매를 모두 대학까지 가르치고, 시집·장가보내니 일흔이 훌쩍 넘었다. 시부모 병구완에, 자식들 뒷바라지에 몸 받쳐 오다 남편도 병을 얻어 10년이 다시 흘렀다. 딸로, 며느리로, 아내로, 엄마로 살아낸 80년 세월. 남편을 보내드리고서야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된 39년생 정숙 씨.


미수(米壽)를 바라보는 그녀에게 새로운 활력을 주게 된 것은 찾아가는 배움 교실이었다. 70여 년 전 기억을 더듬어 한 자 한 자 되살리는 그녀의 마음은 다시 소녀가 되었다. 올해로 4년 차다. 반장도 하고,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면서 새로운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그녀는 욕심쟁이다. 7남매를 모두 대학까지 가르친 그녀의 교육열만큼이나 자신의 공부도 열성적이다. 여든넷의 배움 첫해부터 보령시가 개최하는 성인 문해 교육 시화전에 매번 출품했다. 큰딸과 셋째 딸의 맞춤법 과외도 마다하지 않았다. 전시 평가 기간에는 신경이 곤두서 우황청심환의 신세도 여러 번 졌다. 그렇게 노력해서 첫해 우수상, 둘째 해 최우수상, 셋째 해 대상을 받았다.



문해시화전 시상식.jpg 사진: 보령시 / 왼쪽 첫 번째가 그녀다



나이는 팔십다섯 마음은 이팔청춘/ 세월이 다 흘러갔으니 아쉬운 마음/ 이제 남은 세월 짧게 남았네요/ 가는 세월 밧줄로 꽁꽁 묶을 수도 없고/ 벽에 걸린 시계 멈출 수 없는 시간/ 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가볼래요/ 내 생에 해 보지 못한/ 그림도 그리고 일기도 쓰고/ 친구들하고 소풍도 가고/ 문해교실 다니다 보니 열 살 소녀로 돌아간 기분/ 얼씨구 좋네 절씨구 좋네/ 이렇게 좋은 최고의 보약이/ 문해교실에 왔었네요


주포면 봉당 1리 조정숙 님의 『최고의 보약 문해교실』이라는 2023년 시화전 출품작이다. 39년생 욕심쟁이 그녀는 이제 4년 차 당당한 저작권자다. 저작권은 저작물을 창작할 때부터 발생한다. 어떤 절차나 형식의 이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정지우 작가는 “우리가 주위에 쉽사리 털어놓지 못하는 이야기들이야말로, 백지가 가장 환대하며 기다리는 것들이다”라고 했다. 39년생 정숙 씨가 4절 도화지에 꾹꾹 눌러써 내려간 열세 줄의 인생 이야기가 ‘그땐 다 그랬었어’ 하고 건성으로 보아 넘기기에는 가슴 한구석이 아련하다. 해마다 눈에 띄게 기력이 떨어지는 그녀를 저작(著作)의 산실 문해교실이 힘이 되어주고 있다. 손끝으로라도 질곡의 시름을 털고 배움의 기쁨과 함께 앞만 보고 살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일주일에 두 번 등교하는 장모님께서 올해에도 개근하셨으면 좋겠다. 이제 그녀의 허락을 받아 그녀의 이름으로(성명 표시권) 시화전에 출품했던 세 작품을 공표한다(공표권). 욕심쟁이 정숙 씨를 대신해서 큰사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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