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에게 드리는 두번 째 사과문
"김장을 심어야 하는데 호박 땜이 큰일이네"
"호박이 거름을 다 빨아먹으니 어떡한대"
장모님의 혼잣말이다. 팔순의 장모님은 집 옆의 텃밭을 가꾸신다. 장항선 철도가 높게 지나는 이곳은 100여 평이다. 가장자리는 옥수수, 위쪽 서너 고랑은 수박과 참외가 차지했다. 그 옆은 아삭이고추 10그루가 있다. 철도와 가까운 곳 모퉁이에는 쌈 채소가 있었는데 지금은 호박넝쿨이 덮어버렸다.
올봄 나머지는 잡초가 자라지 못하도록 처제 부부와 함께 두둑에는 검정 비닐을 덮고 고랑에는 제초 매트를 깔아 놨다. 다행히 풀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 빈틈을 노려 어느새 호박 줄기가 밭 대부분을 점령해 버렸다. 그 무더운 날씨에도, 비바람에도 호박은 땅속의 영양분과 뜨거운 태양의 에너지를 받으며 쑥쑥 자랐다.
거름 욕심이 많은 장모님은 올봄에 밭갈이할 즈음에 유기질 비료를 듬뿍 주도록 주문했다. 그 명을 큰딸인 아내가 수행했다. 그 덕분인지 심지도 않은 호박은 밭 가장자리에서 호시탐탐 틈을 노리다가 7~8월 무더위를 틈타 옥수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밭의 대부분을 덮어버렸다. 특히 밭 가운데에서 자란 여러 포기는 줄기가 진로 소주병 주둥이만큼이나 푸르고 튼실하게 자리 잡았다. 봄에 장모님이 주신 유기질 거름 덕분이다.
장모님은 해마다 호박은 심지 않는다. 그런데도 해마다 호박은 어김없이 밭 어디엔가는 난다. 엄동설한에도 얼어 죽지 않고 봄이면 어김없이 밭 가장자리에서, 버림받은 늙은 호박 씨앗이 원한처럼 다시 싹을 튼다. 하기야 미국 위스콘신주 메노모니에서 발견된 800년 전 제작된 토기에 담겨있던 호박을 캐나다 대학생들이 부활시키는데 성공도 했다는 보도(YTN 보도, 2015.11.23)를 보면 역시 호박의 생명력은 대단하다.
대부분 농작물을 수확 시기가 정해져 있다. 벼, 보리, 콩은 완전히 익어야 한다. 참외, 수박도 숙성되어야 한다. 하지만 호박은 사람들이 기다려주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수난이다. 연한 어린잎은 따서 데쳐 먹는다. 애호박은 볶음이나 호박전으로, 특히 비 오는 날 막걸리와도 단짝이다. 늙은 호박은 잘 보관했다 겨울 별미 호박죽과 호박떡용으로 사용된다. 씨앗도 먹는다. 호박 입장에서는 너무하다 싶지만, 인간들은 취급도 안 해주면서 여러모로 쓴다.
늙은 호박 대우도 예전 같지 않다. 먹을거리가 부족했던 시기에는 구황식물 역할도 했으나 치킨과 피자에 자리를 내어준 지 오래다. 안방 차지는 옛날이야기고, 혹여 나중에 쓰일까 하고 추녀 끝에나 창고 구석에 덩그러니 있다가 봄이 되면 어김없이 쓰레기장으로 직행하는 호박 들이다. 그것도 어쩌다 맷돌호박이나 대우를 받지 조선호박은 언감생심이다. 오늘 아침에 줄기를 걷으면서 밭에 덩그러니 나뒹구는 덜 늙은 호박은 추녀 차지는 커녕 옆집 염소들의 식사가 될지도 모른다.
지난 일요일 아침 일찍 처가에 갔다. 대문 이 잠겨있는 것을 보니 장모님은 아직 일어나자 않으셨나 보다. 마당 모퉁이에서 강아지 집에서 연장걸이로 변신한 철제 울타리집에 질펀하게 늘어져 있는 녹슨 쇠스랑, 곡괭이, 호미 등 농기구 사이에서 언제 갈아놓은지도 모를 녹슨 낫을 찾아들고 철문을 열고 텃밭으로 나간다. 호박들이 반갑지 않은 눈치다. "무더위를 이겨내고 잘 커가는데 왜 낫을 들고 오느냐"라고 하는 것 같다. 미안한 마음도 잠시. 오늘 목표는 김장 무와 배추를 심을 공간을 확보하는 것. 다섯 고랑을 덮은 호박 줄기를 제거하는 거다.
덩굴채소인 호박은 잡초 사이에서도 잘 큰다. 자기들끼리 줄기와 잎이 얽히고설켜도 가로 세로 잘도 뻗어 나간다. 호박 줄기를 들고 뿌리를 확인하려니 족히 4~5m는 된다.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려 해도 서로 엉켜있어 찾기 어렵다. 하는 수 없이 줄기를 한 움큼 들고 낫으로 끊어 낸다. 어린순에 호박이 맺혀 있는 것을 보니 몹쓸 짓을 하는 것 같다. 꽃이 달린 애호박도, 중간 크기의 호박도 줄줄이 올라온다. 제법 여물 어가는 큰 호박은 족히 5kg은 넘는다(세계에서 가장 큰 호박은 2023년 미국에서 개최된 제50회 세계호박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미네소타주 트래비스 지엔거가 출품한 1247kg짜리 호박이다). 한 시간 남짓 작업에 비닐과 제초 매트로 덮인 바닥이 보인다. 어느새 태봉산 쪽에서 8월 24일을 밝히는 해가 떠오른다. 절반만 작업했는데도 땀이 비 오듯 한다.
장모님의 말씀으로 보아 나머지 호박들도 조만간 쪽파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할 것 같다. 주인이 원치 않는 생명 호박이다. 아무리 '호박 같은 세상'이라도 호박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할 법하다. 호박은 인간에서 잎에서 씨앗까지 아낌없이 주려하는데, 인간들은 그 마음을 몰라주고 '호박에 말뚝 박기'다 인간과 호박, 호박과 인간의 공생,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오늘 아침 상에 애호박볶음과 호박 순이 올라왔다. 그 밭에서 며칠 전에 가져온 것들이다. 호박순을 좋아하는데 오늘은 왠지 그때 그 맛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