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혜원 작가의 《박완서 마흔에 시작한 글쓰기》( 도서출판리수, 2022)
"소설가 박완서는 어떻게 글을 썼을까?" 하는 궁금증에 구입한 책이다. 솔직히 박완서가 쓴 '마흔에 시작한 글쓰기'인 줄 알았다. 박완서에 대한 양혜원 작가의 에세이였다. 그래도 좋았다. 술술 읽히는 글이 박완서 이야기인지? 양혜원 이야기인지 가끔은 헷갈려도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았다. 양 작가가 쓴 박완서 평전 같은 책이다.
여성학 연구자이자 박완서 연구자인 양혜원 작가는 여성, 종교, 문화에 대한 저술과 번역 활동을 해왔다. 현재는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녀는 '자기'를 사용하는 연구 방법으로 여성의 경험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글쓰기를 추구하며, 글을 알아 막을 수 있어야 한다는 번역가 시절의 소신을 따라 전문가 집단의 언어보다 나의 어머니와 대화가 가능한 언어를 지향하며 글을 쓰고 있다. 그래서인지 쉽게 읽힌다. 어느 구절에서는 박완서에 빙의된 느낌도 있다.
169쪽의 문고판에 가까운 아담한 책이다. 박완서의 마흔, 평등, 그리고 연애 섹스와 임신, 트라우마, 고통, 독립이라는 여섯 가지 카테고리로 구성되어 있다. 주제마다 담긴 박완서의 마음을 아련하면서도 담담하게 풀어낸다. 저자가 여성학 연구자여서인지 섬세하면서도 절절하다. 가볍지도 않으면서 차갑지도 않다. 양 작가는 박완서의 글쓰기 근간을 다음 세 가지로 보고 있다.
첫째, 기억의 글쓰기다. 소설가가 된 지 20여 년이 되었을 때 출판된 《박완서 문학 앨범》(1992)에서 그는, 자신이 소설가가 된 것은 결국 전쟁 경험의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전쟁 중 사망한 오빠의 망령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었다가, 나중에는 자신의 발꿈치에 붙어 다니며 떨치려야 떨칠 수 없는 기억이 되어 자신의 글쓰기를 지배하는 것이 전쟁의 경험이라고 했다.
40이라는 늦은 나이에 작가로 출발했지만, 그전에 그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6.25 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오롯이 기억 속에 남아 글쓰기를 지배하는 큰 줄기가 되었다. 그러한 과정을 이 책은 자연스럽게 박완서의 마음속으로 안내를 한다.
둘째, 복수로서의 글쓰기다. 수류산방, 중심 편집부가 《예술사 구술 총서 005 박완서: 못 가 본 길이 더 아름답다》 수류산방(2012) 133쪽에서 "박완서의 문학은 복수로서의 글쓰기로도 알려져 있는데, 그는 언젠가는 이것을 글로 쓰리라는 생각이 그 상황을 견디는 데에 도움이 되었고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지킬 수 있게 해 주었다"라고 했다.
그렇다.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글로 옮기면 스스로의 갈등이 무엇인지 내 감정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짐으로써 불안과 불만이 줄어든다. 피할 수 없는 상황과 현실이 억누를 때, 하기 싫지만 해야만 하는 일을 억지로 해야 할 때, 생각지도 않은 일이 일어나고 그 일을 어쩔 수 없이 내가 해결해야 할 때 그는 그런 방법으로 글감으로 인식하고 견뎌냈다.
셋째, 납득의 글쓰기다. 박완서는 제25회 동인문학상 작품집인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조선일보사, 1994) 43쪽의 맨 마지막 장면이 이렇게 나온다. 절벽 같은 침묵 속에서 듣기만 하던 시댁 형님이 마침내 운다. 처음에 화자는 형님이 울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다가 문득 깨닫고는, "아니, 형님 지금 울고 계신 거 아뉴" 하고 묻는다. 그러고는 형님이 울면 안 된다고, '형님은 언제나 저에게 통곡의 벽"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통곡의 벽이 우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대요" 하는 말로 소설은 끝난다.
작가는 "통곡의 벽이 우는 법은 없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통곡의 벽이 나와 함께 운다는 것을 깨달을 때, 치유는 시작된다."라고 했다. 무던한 시댁 형님도 아우의 절규에 동화하는 과정을 표현한 박완서의 필력을 납득하기에 충분했다.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알고자 하는 호기심이 없으면 우리는 만나지 못한다. 그리고 어쩐 일인지 서로의 고통을 알 때 우리는 더 깊이 만나는 것 같다."라고 했다. 박완서의 글쓰기가 기억을 기반으로 한 복수와 납득의 글쓰기라는 것을 알게 해 준 양혜원 작가와 만남이 40대에 접어든 여성들에게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