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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단화 Sep 19. 2024

열여덟 유럽일기 013

우당탕 브레멘 음악대

2016.09.19

Bremen, Deutschland


 어제에 열심히 걸어 다닌 여파인지 느지막하게 눈을 떴다. 빈 공간을 채우는 시원한 공기가 달가웠다. 어제는 찬 공기가 그리도 춥고 싫더니 자고 일어나 따끈해진 몸은 시원한 바람을 반긴다.

 

 설렁설렁 준비해 숙소를 나왔다. 5층 계단은 올라갈 때도 힘들지만 내려올 때도 만만찮게 피곤했다. 아래층에 위치한 더블룸이나 싱글룸을 볼 때면 '나도 독방을 쓸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이어서 떠오르는 통장잔고에 고개를 저었다.

 대충 계산기를 눌러보니 오늘까지 아끼고 조이면 2일 차에 빼앗긴 벌금을 상쇄할 수 있을 듯싶었다. 점심을 대충 때우고 저녁은 예산회복(?) 기념으로 맛있는 걸 먹어야지 다짐했다.


 10시쯤 나와 어제와 같은 랜더 티켓을 구매했다. 땅이 넓으니 하루종일 주()를 돌아다니는 표를 판다. 몇 번 해보았다고 재빨리 돈을 넣고 표를 챙겨 빠른 걸음으로 플랫폼을 찾았다. 열차를 놓치기 싫어 서두른 보람이 있는지 내가 열차에 오르고 1분 만에 열차가 출발했다.


 열흘간 여행을 하면서 그래도 열차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처음 타보는 2층열차에 눈이 저절로 커졌다. 확실히 올라간 시야는 좀 더 시원했다. 다만 2층열차를 운용할 정도로 이용객이 많았는지 사람 역시 다를 때보다 많았다.

 잠시 2층시야를 구경하다 한쪽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깐 사색이라도 잠길라 더니 입장한 순간부터 불안했던 꼬맹이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아... 고문의 서막이었다.

 

 그 누가 독일은 규칙과 규율의 민족이라 하였는가. 왜 그 규칙과 규율이 이때는 발휘되지 않는 것인가. 고막을 찢을듯한 소음은 하노버에서 브레멘으로 가는 내내 이어졌다. 그렇다. 오늘의 목적지는 우리가 동화로도 잘 아는 이름인 브레멘이라는 도시다. 그러나 나는 아직 도시 근처에도 가지 못했는데 내 귀옆에서는 온갖 짐승소리가 다 들렸다.


 한쪽 창가에서는 초등학생쯤 되는 남자애가 쉬지도 않고 떠들었다. 잠깐 웃고 마는 게 아니라 악을 지르고, 노래를 부르고, 뛰어다녔다.

 그 옆에라고 조용했던 것은 아니다. 어딜 가든 있는 몰려다니는 10대 무리는 경쟁이라도 하듯 목소리를 따라 높였다. 낄낄거리고 꺽꺽거리는 웃음소리를 1시간째 듣고 있으니 그냥 저들이 오늘 하루 웃을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못된 심보마저 치솟아 올랐다.

 

 이미 미성년자들만으로도 내 고막과 정신은 힘들 것만 빵을 먹을만치 먹은 어른들도 난리 부르스를 떨었다. 아이의 가족들은 아이의 목소리를 묻으려는 듯 소리를 올렸고 깨 볶는 커플은 저들끼리 얘기를 하다 찢어질 듯 한 소리로 깔깔거렸다.

 그러다 입이라도 맞추면 내 안의 유교걸이 뛰쳐나와 소리를 지르고 싶어졌다. 내가 있는 곳이 열차인 걸까 유치원인 걸까 동네술집인 걸까 호텔인 걸까.

 이어폰을 뚫고 오는 소리를 견디고 브레멘에 도착했을 때 나의 정신력은 이미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열차에서 내려 중앙역을 도망치듯 나왔다. 목표인 브레멘 동상을 보러 가는 길에 풍차가 있는 공원이 있다기에 먼저 좋다구나 공원으로 향했다.

 혹사당한 귀를 쉬어주며 길을 걸으니 도시의 소음은 은은한 백색소음이 되었다.

조용하고 편안했던 공원풍경


 공원을 지나 외관이 아름다운 교회가 보여 잠시 발을 멈췄다. 문쪽으로 다가가니 안쪽의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현지인으로 보이는 분이 문을 열고 들어가길래 따라붙어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문 안쪽으로 내 얼굴이 보이자마자 근처에 있던 아저씨 한분이 부랴부랴 다가왔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도망가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있던 나를 손으로 부르고는 맨 뒷자리 의자를 가리켰다.


 의자를 찾아가 앉는 내내 고개를 내밀었을 때부터 들려오던 격양된 설교는 점점 강해지고 나는 내가 예배시간에 찾아온 눈치 없는 관광객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얌전히 자리에 앉자 아저씨는 지금 나갈 수 없으며 예배가 다 끝나고 나가야 한다고 내게 몇 번이고 강조해서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을 맞잡자 아저씨는 나를 놔두고 다시 문 앞자리로 이동했다. 얼마 뒤 멋모르고 들어온 관광객 하나가 또 아저씨에게 잡혀 내 옆옆 자리로 이송되어 왔다.


 목회자로 보이는 분들이 두어 명 지나가고 설교 역시 점점 격양되어 갔다. 겉으로 보았을 때는 이미 죽어버린 유적 같았는데 안에 들어오니 사람들이 움직이며 생동감으로 건물을 가득 채웠다.

 공간을 가득 울리는 여자의 목소리가 이곳은 죽은 곳이 아닌 아직 기능하고 살아 숨 쉬는 곳이라 말해준다. 내용은 전혀 알 수 없지만 공간을 채우는 그 에너지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신기했지만 조금 기괴하기도 했다. 모두가 같은 동작을 하고 같은 말을 내뱉는 게 미묘한 불쾌감을 주었다. 군무를 볼 때는 감탄이 나오지만 이 행위들이 믿음이라는 무형의 것을 기반으로 나오는 행동이라 생각하니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종교의 교리는 사람을 하나로 묶는다. 유대가 생기고 공동체가 된다. 그러나 동시에 합은 분열과 배척을 낳는다. 그건 인류 역사 동안 변하지 않았던 사실이며 나의 경험이기도 하다.

 여러 상황에서 '집단'의 밖에 있던 사람으로서 느낀 그들의 결합은 신기하고, 무섭고, 본능적이다.

 나 역시 사람인지라 소속감이 들 때도 있지만 그렇기에 스스로 경계하게 된다. 서로의 신뢰가 두터운 것과 사고가 편협해지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기에 항상 그 둘을 분리하려 노력한다.


 예배가 끝나고 사람들을 따라 교회를 나왔다. 도시에 온 목적인 브레멘음악대 동상을 찾아 마르크트광장으로 향했다. '구시가지'라는 이름처럼 옛 모습과 건물이 아름다운 광장이었다.

 그러나 시청사와 15세기 상인들이 지은 화려한 건물을 구경하는 내내 나는 브레멘음악대의 동상을 찾지 못했다. 분명 이 광장에 있다고 하는데 눈에 보이지 않았다. 3바퀴쯤 뺑뺑돌고 골목도 쏘아 다녀봤지만 영 눈에 걸리는 게 없었다.

 구글맵은 내가 동상 앞에 서있다 말하는데 내 눈에는 동상이 보이지 않았다. 진지하게 내 핸드폰이 잘못되었나 고민할 때 구석에서 빛나는 당나귀를 발견했다.

생각보다 작고 건물에 붙어있었다

 

 코앞에 두고도 못 알아본 게 어이없었지만 일단은 찾았으니 사진먼저 찍어주었다. 당나귀의 다리를 만지면 소원을 이루어준단 속설이 있어 당나귀의 다리는 반질반질했다. 나 역시도 소원을 빌었는데 이제와서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언제나 그렇듯 가족의 안녕과 내 집마련을 기원했을 성싶다.

 

 시가지를 더 구경하다 트램에 올라탔다. 구시가지를 가로지르는 트램은 교통수단으로도 좋지만 풍경이 워낙 좋아 일종의 관광열차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편하게 구경하고 브레멘의 중앙역으로 향했다. 조금 일찍 숙소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내일 하노버를 떠나 베를린으로 가야 했기에 부지런히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하노버로 돌아오는 기차는 안락하고 조용했다.


 숙소에 돌아와 침대에 앉으니 만사가 다 귀찮았다. 잠시 게으름을 피우다 저녁을 위해 5층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유럽여행 필수코스라는 납작 복숭아를 사고 작은 간판대에서 파는 피자도 샀다. 오늘은 예산을 회복한 날이라 맛난 것을 먹겠다 다짐했지만 평생소원이 누룽지인 나는 길거리 피자가 특식이다. (나는 일주일 내내 피자를 먹어도 좋다.)

 

 벤치에 앉아 내 얼굴만 한 피자를 갉아먹으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피자의 도우가 굉장히 두꺼웠지만 나름 맛있었다. 그러나 다 먹지 못하고 반은 남겨두었다.

 원래도 대식가는 아니었지만 여행을 다니며 굶고 다녀서 그런지 위가 줄어든 느낌이었다. 남은 피자는 내일 아침 베를린으로 가는 기차에서 먹자 생각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내일은 오래간만에 부지런을 피워야 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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